한 무대에서 몸을 둘로 쪼개기. 배우 이문식(54)은 요즘 이런 분신술을 연습하고 있다. 5월 21일 개막하는 연극 ‘소년이 그랬다’(연출 남인우)에서 15세 소년과 42세 형사, 1인 2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조연 전문으로 기억되는 이문식은 “무대에는 NG가 없고 러닝타임을 오롯이 책임져야 해 설렘 반 긴장 반”이라며 “두 인물을 즉석에서 왕복하는 게 부담이지만 ‘가보지 않은 길’이라 끌렸다”고 말했다.
“점퍼 지퍼를 이렇게 내리면 형사, 올리면 소년입니다(웃음). 형사로 갈 때는 포장도로처럼 수월한데 소년으로 돌아올 땐 덜컹덜컹 난코스예요. 말투와 동작으로 차이를 만들겠지만 ‘옛날처럼 내가 날것으로 무대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제일 큽니다. 중고생인 애들을 집에서 관찰하면서 힌트를 얻어요.”
호주 원작 ‘더 스톤즈(The Stones)’를 번안한 ‘소년이 그랬다’는 두 소년이 육교에서 던진 돌에 자동차 운전자가 숨진 사건을 따라간다.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가 10년 전 국내 초연해 관객과 평단의 지지를 받았다. 2인극인데 한 명은 소년 상식(15)과 형사 정도(42), 다른 한 명은 소년 민재(13)와 형사 광해(29)를 연기한다. 지난 7일 이문식과 나눈 이야기를 세 단어로 푼다.
◇1. 허허벌판 “무대는 숨을 곳이 없다”
송강호, 김윤석 등 영화로 건너간 배우들은 다시 무대에 서는 것을 겁낸다. 발성·발음 연습을 다시 해야 하고 몇 개월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민폐 끼칠까 봐 두렵다고 한다. 1992년 극단 한양레퍼토리에서 데뷔한 이문식은 “촬영과 편집에 익숙해지다 보면 연극은 허허벌판이라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라며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고 쌓아온 게 훼손될 수도 있지만 배우가 다 책임진다는 점은 매력적”이라고 했다.
연극은 5년 만이다. 한양레퍼토리에서 ‘배우로 숨 쉬는 법’을 배웠다고 그는 술회했다. “나름 한양대 연극영화과 출신인데 ‘넌 왜 그렇게 숨을 못 쉬냐’(최형인 교수)는 지적을 숱하게 받았습니다. 뜻을 이해하는 데 거의 10년 걸렸어요. 대사 한 줄에도 숨이 붙어 있으니, 기계적 호흡이 아니라 적당한 느낌을 찾으라는 거였지요. 대나무에 매듭이 생기면 쭉쭉 크듯이 그때부터 연기가 는 것 같아요.”
◇2. ‘비굴한’ 쓸모 “정우성은 애써도 불가능한…”
연봉 300만원 받으며 연극을 하던 무명 시절에는 영화 배우를 동경했다. 단역을 거쳐 영화 ‘간첩 리철진’(1999)에서 택시 강도를 연기하며 소속감을 처음 느꼈고 ‘달마야 놀자’(2001) ‘공공의 적’(2002) ‘황산벌’(2003)로 인지도가 생겼다. “배우 인생 30년을 돌아보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했다.
어설픈 악역이나 웃기는 조연으로 소비되는 데 대한 불만은 없을까. 이문식은 “그래서 멜로의 주인공(드라마 ’101번째 프로포즈') 등 다른 색깔에 도전했다가 KO패 당했다”며 덧붙였다. “2006~2007년이 참 힘겨웠어요. 출연 제안도 뚝 끊어졌는데 망한 원인을 분석해봤습니다. 대중이 이문식에게 원하는 건 따로 있구나. 재미있고 정감 가는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변신욕을 다 버린 건 아니고요(웃음).”
열심히 살아도 잘 안 풀리는 인생, 어쩌면 그것이 이문식이다. “불운의 아이콘이죠. 그런 사람을 보면 편하고 위로를 받잖아요! 비주얼이 제 부류에 속하는 유해진도 배울 게 많은 후배예요.” 이정재나 정우성이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쓸모라고 했더니 배우는 폭소를 터뜨렸다. “고맙습니다. 귀한 줄도 모르고 과욕을 부렸네요.”
◇3. 쇼생크 “누구나 탈옥을 꿈꾼다”
비굴한 연기로는 국내 원톱으로 꼽힌다. 드라마 ‘일지매’ 때는 스스로 앞니를 뽑기도 했다. “제가 봐도 이문식은 좀 없어 보여요. 그래도 딱해 보이는 악역 말고 진짜 악역을 해보는 게 꿈입니다. 양반이나 연산군 같은 왕도 잘할 자신 있거든요.”
‘소년이 그랬다’에서 상식이가 자유를 얘기하는 장면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상식이 방에 영화 ‘쇼생크 탈출’ 포스터가 붙어 있어요. 억울하게 갇힌 주인공은 탈옥을 꿈꾸지요. 자유! 상식이한테는 집이 쇼생크고 구린 동네도 쇼생크고 학교도 학원도···. 누구나 자기만의 ‘쇼생크’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 배우는 ‘가보지 않은 길’을 뚫는 중이다. 탈옥에 성공할지 미수에 그칠지는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