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화 화백이 작품 ‘무제 84-3-8’(1984) 앞에 앉아있다. 멀리서 보면 흰색 벽지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실핏줄 같은 격자무늬 사이에서 다층적인 빛깔이 우러나온다. 한 일본 평론가가 “정상화의 흰색은 무지개”라고 평한 이유다. /갤러리현대

“이게 뭡니까?”

“그림입니다.”

“여기 어디에 그림이 있습니까?”

1980년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정상화 화백이 첫 개인전을 위해 귀국하던 길. 공항 세관원이 둘둘 말아온 작품을 펼치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얼핏 보면 흰색뿐인 그의 ‘그림’을 알아보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열린 전시를 보고, 화가 이우환은 “세계 어디를 다녀도 이런 장인 정신을 갖고 이렇게 어려운 작업을 하는 작가는 보지 못했다”고 감탄했다.

직접 보아야 이 말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단색화 거장 정상화(91) 개인전 ‘무한한 숨결’이 열리고 있다. 멀리서 보면 그저 벽지 같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실핏줄 같은 격자 무늬 사이사이에서 4~16가지 색이 중첩돼 우러나온다. 전시장에서 만난 노(老)화가는 “구순이 넘어서도 개인전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이 나이에도, 그림이라는 게 끝이 없더라”고 했다. “매일 새로운 걸 하려고 했는데, 매일 똑같은 게 나왔습니다. 하나 뜯어내고 메우고, 또 뜯어내고 메우고···. 참 바보스럽죠. 하지만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바보스러움이 바로 제 작품을 말해줍니다. 사람이 사는 것도 결국 반복이지요.”

정상화, ‘무제 12-5-13’(2012). 259 x 194 cm. /갤러리현대
정상화 화백이 위 사진의 작품인 파란색 색면 ‘무제 12-5-13’(2012)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멀리서 보면 파란색만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뜯어내고 메우는 과정을 반복하며 생긴 실핏줄 같은 선들이 보인다. /뉴시스

인내와 투지가 빚어낸 결과물이다. 작품 하나에 최소 6개월, 길게는 1년이 걸린다. 먼저 캔버스에 고령토를 3~5㎜ 두께로 바르고, 완전히 마르면 수직·수평선 또는 대각선을 따라 접어 화면에 균열을 낸 뒤 일부 고령토를 뜯어내고 그 자리에 물감을 채워넣는다. 남은 고령토를 또 뜯어내고 물감을 메우는 행위를 5~6회 반복한다. 수행에 가까운 노동을 통해 작은 네모꼴마다 미세한 차이를 품은 시간의 무늬를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평론가 이일은 정상화의 작품을 “은밀한 숨결의 공간”이라고 평했다.

1층 도입부에 걸린 ‘과정 5’(2017). 고령토를 일부 남겨둬, 뜯어내고 메우는 작가의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갤러리현대

1세대 단색화 대표 주자다. 팔순 넘어 한국 단색화가 주목받으면서 세계 미술 시장에 이름을 올렸다. 경매 최고가 11억원대(2015년 10월 서울옥션 홍콩)에 달한다. 2011년 프랑스 생테티엔 현대미술관, 2020년 런던 레비고비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고령에도 조수 없이 작업하는 그는 “내 성격이 별나서 그렇다”며 “작업할 때 딸이 옆에 와도 신경이 쓰여 나가라고 한다. 요즘은 기력이 없어서 3~4시간 잡고 있으면 손목이 툭 떨어진다”고 했다.

정상화, '무제'(1974). 캔버스 작품 위에 한지를 올려 흑연으로 탁본 뜨듯 만든 작품이다. 186 x 94.5 cm. /갤러리현대

1970년대부터 근작까지 40여 점이 나왔다. 한지를 미싱으로 꿰매고 여러 겹 쌓거나, 캔버스 작품 위에 한지를 올려 연필로 탁본 뜨듯 만든 작품 등 그간 색면에 가려진 다양한 재료 실험도 조명했다. “지금도 그림 얘기 하는 게 제일 좋고, 밥 먹을 때도 그림 얘기를 해야 밥맛이 난다”는 화가는 “사람들은 인생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만 답은 없다”고 했다. “그림은 노력한 만큼 나타납니다. 타고난 재주, 그거 안 통해요. 어떤 분야든지 노력 없이 이뤄지는 건 없습니다. 이 말 한마디는 자신 있게 말하고 싶어요.” 7월 1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