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물감도 접고, 종이도 접고, 철판도 접는다. 그리고 공간을 만든다. 빈 공간을, 마음도 한쯤 접어놓고 텅 비워진 기분이다.”
조각가 김인겸(1945~2018)은 프랑스 파리에 체류 중이던 1997년 이런 노트를 썼다.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첫 한국관 전시에서 곽훈·윤형근·전수천과 함께 한국 대표 작가로 참여한 그는 이듬해 퐁피두센터 초대를 받아 파리로 건너갔다. 낯선 도시에선 작업 공간도 협소했고 재료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때 돌파구처럼 찾아낸 재료가 종이, 그리고 ‘접기’라는 조형 방식이었다.
대구 우손갤러리에서 김인겸 개인전 ‘조각된 종이, 접힌 조각’이 열리고 있다. 작가가 파리에 정착하며 활동하기 시작한 이래 변화된 양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됐다. 작가의 딸인 김재도 미술평론가가 기획하고, 아들 김산 사진작가가 작품을 촬영했다. 김재도 평론가는 “아버지는 면(面)을 가지고 입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셨다. 면은 그 자체로 서 있을 수 없지만, ‘접기’라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입체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며 “이번 전시는 특히 ‘접기’라는 독특한 조형 방식을 집중 조명했다”고 했다.
종이를 접듯 철판을 접은 조각들이 전시장 벽에 걸렸다. 종이 위에 구현한 조각 실험도 볼 수 있다. 2007년 이후 작업한 ‘스페이스리스(Space-Less)’ 시리즈다. 김인겸은 스퀴즈(밀대)에 먹물이나 아크릴 물감을 묻혀 종이 위에 겹쳐서 밀어내는 것만으로도 투명한 실크가 겹쳐지듯 공간감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김재도 평론가는 “‘스페이스리스’ 연작에는 무한이라는 뜻이 담겼다. 조각의 무한한 가능성에 도달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끊임없는 실험과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도 영상과 아카이브로 나왔다. 아크릴 수조에 물을 채운 당시 한국관 출품작은 원형 전시장이라는 한국관의 공간적 특성을 반영한 설치 작업이었고, 관람객들은 중앙부 나선형 계단을 통해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내리며 작품을 감상했다. 지금과는 다른 초기의 한국관 모습을 볼 수 있어 더 귀한 영상이 됐다. 4월 19일까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