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최악의 조건하에서 생활해온 표현, 올바른 방향의 외침을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1954년 6월쯤 이중섭이 쓴 글이다. 제국의 패권주의와 동족상잔의 전화에 이리저리 휩쓸리면서도 이중섭의 가슴에는 세계인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외침이 있었다.
1954년 7월 30일 원산의 선배 정치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확인된다. “절반은 살아온 우리들이 (중략) 나머지 절반은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사람으로서 하는 지고의 일이 예술 아니던가. 이중섭에게서 풍기는 이러한 고졸한 향취, 한 세기의 활력과 슬픔이 농축된 보편적 휴머니즘의 자태를 곽남신이 걸어온 예술에서도 만난다.
곽남신의 예술이 걸어온 행보는 요란하지 않고 품위가 있다. 당대를 주도했던 모더니즘 미술의 근엄주의와 형식주의에 눌리거나 치우치지 않았고, 그럴싸하게 들리는 ‘후기’나 ‘해체’ 운운하는 담론에 편승하지도 않았다. 예술적 보수거나 진보, 글로벌주의나 지역주의의 어느 한쪽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했다. 양자 모두에서 신기루를 좇는 헛헛함을 경험하면서, 곽남신은 그만의 대안적 경작지를 찾아 나섰다.
부조리, 위선, 엉터리 신화를 찌르는 뾰족함을 잃지 않았다. 무겁지 않지만 진지하고, 선언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지만 메시지와 진정성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 점에서 다시 이중섭과 교차한다. 민족은 문화적인 기억이 없다면 병들게 된다. 이중섭의 삶과 예술의 길을 기억하는 일의 의미다. 그래서 이중섭의 길은 우리에게로 가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 길에서 곽남신과 마주하는 일은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자연스럽기만 하다.
/제37회 이중섭 미술상 심사위원회 김인혜·류철하·서성록·심상용·정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