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컴컴한 무대 뒤와 객석에서 배우를 위해 빛을 만들어내던 김창기 님, 오늘은 당신이 스타입니다.”
14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사 편집동에서 열린 제35회 이해랑연극상 시상식. 수상자 김창기(65) 조명디자이너와 절친한 31회 수상자 이태섭 무대미술가의 축사에 축하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김창기 님은 단순히 무대를 밝히는 것을 넘어 관객에게 감동과 몰입의 경험을 선사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습니다. 앞으로도 그 빛으로 우리 모두를 감동시켜 주시길 바랍니다.”
올해 이해랑연극상은 35년 만에 처음으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우리 공연 무대를 밝혔던 김창기 조명 디자이너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그는 우리 공연 조명의 ‘대부(代父)’라 불릴 만하다. 배우와 연출가에게 쏠렸던 이해랑연극상의 지평도 한층 넓어졌다.
김씨는 수상 소감을 통해 “선정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매일 웃음이 나고 행복한 날이 계속됐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조명 디자인은 단순히 기능적인 역할을 넘어 공연의 감정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관객의 마음에 비추는 예술이라 믿습니다. 상을 받는 지금 그런 믿음이 인정받은 듯해, 기쁨과 함께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이해랑연극재단(이사장 이방주)과 조선일보사가 운영하는 이해랑연극상은 연출가 이해랑(李海浪·1916~1989) 선생이 추구한 리얼리즘 연극 정신을 이어가는 국내 최고의 연극상이다.
김창기 조명 디자이너는 1996년 데뷔 이후 30년 동안 손진책, 한태숙, 이성열, 김광보 등 우리 연극을 대표하는 연출가들과 함께 일했다. ‘허삼관 매혈기’ ‘서안화차’ ‘벽 속의 요정’ ‘3월의 눈’ ‘레이디 맥베스’ ‘벚꽃동산’ 등 그가 조명을 책임진 연극만 180여 편이다. 심사위원회는 “우리 연극에서 조명의 역사는 그의 작업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라며 “철저한 대본 분석으로 최적의 빛을 찾아내려는 노력, 시각적 화려함보다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조명을 지향하는 점 등은 이해랑의 리얼리즘 연극정신과도 맞닿아 있다”고 했다.
배우 박근형(85)씨는 올해 이해랑연극상 특별상을 받았다. 1960년대 중반 국립극단에서 활동했던 그는 늘 그리던 연극 무대로 돌아와 ‘아버지’ ‘세일즈맨의 죽음’ ‘고도를 기다리며’ 등의 작품으로 관객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그는 “생전의 이해랑 선생님이 연출하신 ‘리어왕’에 출연한 적이 있다. 평생 딱 한 번이었다”고 했다. “제가 연극을 하면 행동이 좀 과격하거든요. 한 번은 저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이봐, 내면으로 해, 내면으로’ 하셨어요. 평생을 두고 저를 가르쳐주신 그런 선생님들 말씀을 중하게 알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회를 맡은 배우 손숙씨는 “이해랑연극상은 이제 연극인들의 꿈이 됐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해랑 선생님이 우리 연극인들에게 더 큰 분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라고 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참석해 이해랑 선생이 연출한 ‘햄릿’에 두 차례 출연했던 추억을 나누며 축사를 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운영위원 김윤철·임선옥씨, 심사위원 박정자·손진책·이화원·이은경씨를 비롯해 이해랑 선생의 가족인 이방주 이해랑연극재단 이사장과 이석주·이은숙씨, 차혜영 차범석연극재단 이사장, 역대 이해랑연극상 수상자 길해연·남명렬·박명성·박지일·손봉숙·이성열씨, 고 김동원 선생의 아들 김진환·김세환씨, 어윤대 전 고려대 총장, 이종찬 광복회장, 방준오 조선일보 사장 등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