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1일 도쿄 데라다 창고에서 개막한 ‘움직이는 우키요에전’이 지난달 31일 종료됐다. 삼성역 사거리의 ‘웨이브(Wave)’, 아자부다이 힐스의 ‘팀 랩 보더리스(Team Lab Borderless)’처럼 몰입형 디지털 아트 전시란 얘기를 듣고 방문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이 전시를 기획한 곳은 ‘히토하타’라는 창립 6년 차 디지털 아트 회사다. 연매출은 약 30억원으로, 앞서 웨이브로 주목받은 디자인 기업 디스트릭트의 10분의 1, 팀 랩의 30분의 1 규모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의 꿈은 결코 작지 않다. 일본어 ‘일기(一旗)’에서 따온 히토하타란 회사 이름은 의욕적으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한다는 뜻을 담았다. 후발 주자는 선발 주자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 봐야 들러리를 벗어날 수 없다. 스스로의 영역을 좁혀야 독자적인 색깔이 생긴다. 히토하타는 자사의 역량을 예리하게 다듬기 위해 일본 전통 문화에 주목했다. 가장 일본적인 것이 곧 가장 국제적인 것이 될 수 있으리란 판단이었다.
우키요에는 그 대표적인 분야다. 에도 시대 서민들의 일상, 가부키(전통 공연), 배우, 미인, 풍경 등을 목판화로 그려낸 이 장르는, 19세기 중후반부터 국제화의 길을 걸었다. 1867년 제2회 파리 만국박람회 일본관엔 도자기와 함께 우키요에도 전시됐다. 선명한 색채, 대담한 구도, 그림자 없는 독특한 표현 방식은 인상파 화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클로드 모네는 아내에게 일본 전통 의상을 입히고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를 그리기까지 했다.
1998년 미국 잡지 라이프는 ‘최근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을 선정했다. 중국의 주희와 마오쩌둥, 인도의 간디, 몽골의 쿠빌라이 칸 등과 함께 아시아 인물들도 일부 포함됐는데, 일본에선 우키요에의 거장 호쿠사이가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클로드 드뷔시가 ‘바다(La Mer)’라는 관현악곡 앨범의 표지에 호쿠사이의 파도 그림을 넣을 정도였으니, 그의 명성이 세계적이란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호쿠사이 한 명으로 전시 공간을 채우기엔 아쉽다. 이번 전시는 서정적 풍경화의 히로시게, 상반신 미인화를 그린 우타마로, 역사 스토리텔링을 담은 구니요시, 다수의 여성을 함께 묘사한 수니사다, 혜성처럼 나타나 사라진 샤라쿠까지 여섯 대가의 작품을 디지털 공간에 구현했다. 그리고 관객을 그 세계로 끌어들였다.
입장하면 각진 아치형 통로가 나타난다. 잔잔한 음악을 따라 아치를 통과하면 후지산을 배경으로 한 농촌 풍경이 펼쳐진다.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예기치 않은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 앞뒤 좌우 네 면의 벽이 바다로 변한다. 키보다 훨씬 높은 벽에 파도가 넘실대고, 곧이어 거대한 고래와 문어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미인도를 묘사한 공간엔 바닥에 꽃이 피어 있다. 어두운 조명 탓에 실제 꽃인지 헷갈리지만, 반투명 스크린 뒤편으로 보름달 아래를 걷는 몇몇 미인이 보인다. 곧이어 낮이 되고,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 위로 화려한 미인들이 등장한다. 천장과 바닥 모두에 벚꽃이 투영돼 현실 감각을 잃을 정도다.
전쟁 장면을 나타내는 공간엔 바닥에서 용이 불을 뿜으며 회전하고, 벽에는 무사들이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장면이 펼쳐진다. 마지막 전시 공간엔 후지산 모형이 놓여 있고, 호쿠사이 작품 속 후지산의 다양한 모습이 디지털 아트로 펼쳐지며 마무리된다.
이번 도쿄 전시의 관람객은 약 8만명이었다. 도쿄 중심에서 떨어진 창고형 공간에서 열린 전시란 점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다. 이번 전시는 히토하타의 본거지인 나고야에서 출발해 가고시마, 밀라노를 거쳐 도쿄까지 이어졌고, 6월 이후엔 후쿠오카로 향할 예정이다. 헤르만 지몬은 저서 ‘히든 챔피언(글로벌 강소 기업)’에서 독일의 경쟁력이 좁은 우물을 파면서 글로벌을 지향하는 강소 기업에서 비롯된다고 밝혔다. 그 말이 제조업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히토하타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