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서울 성북구 월곡2동 주민센터 앞에서 쌀 기부 행사가 열렸다. 쌀을 기부한 주민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지난 14년간 매년 쌀을 기부한 ‘얼굴 없는 천사’가 앞으로 쌀을 보내기 어렵다고 하자 주민들이 나서 쌀 300포를 모은 것이다./성북구

“이제 쌀을 보내드리기 어렵게 됐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작년 12월 30일 서울 성북구 월곡2동 주민센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14년째 20㎏ 쌀 300포를 형편이 어려운 월곡2동 주민들을 위해 보내온 ‘익명의 기부자’ 전화였다. 그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동안 익명의 기부자가 보낸 쌀 무게만 총 84t(4200포), 시가로 2억2000만원 정도다. 그가 기부한 쌀 수백 포가 가득 실린 트럭에서 쌀을 내리던 일은 월곡2동의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주민센터 관계자는 “월곡2동 저소득층 주민 가운데 기부자가 보낸 쌀을 받지 못한 분은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기부 중단 소식에 월곡2동 주민센터에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문의 전화가 쏟아졌다. “기부자가 어디 편찮으신 거냐” “혹시 기부 때문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건 아닌지 걱정된다”는 주민들 전화였다. 익명의 기부자는 주민센터 측에도 자기 신원을 비밀에 부쳐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성북구청 관계자는 “어떤 분인지 구청 직원들이 물어볼 때마다 ‘물어보지 말아 달라’고 간청해 이름이나 직업을 더 이상 추적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월곡2동에 24년째 살고 있는 윤재성(70)씨는 “주민들도 이 ‘얼굴 없는 천사’의 존재가 궁금해 다방면으로 알아봤지만, 할아버지인 것으로만 알고 있다”고 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동네 저소득층 300가구였다. 익명의 기부자가 보내던 쌀은 주머니 사정이 빠듯했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월곡2동 주민들은 지난달 8일 긴급 회의를 열었다. 주민들은 회의를 연 지 30분 만에 “우리가 기부자의 뜻을 이어 나가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앞으로 기부자 대신 주민들이 동네 저소득층 이웃들을 위해 십시일반으로 쌀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주민들은 지난달 17일부터 ‘월곡2동 마을 천사 온기 나눔 사업’을 벌였다. 취지에 공감한 주민들과 금융기관, 동네 마트 등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 결과, 보름 만에 10㎏짜리 백미 300포가 모였다. 얼굴 없는 천사가 매년 기부한 쌀을 이번에는 주민들이 똑같이 마련한 것이다. 쌀 300포는 거동이 불편한 독거 노인 등 저소득층 이웃들에게 지난 11일 배달됐다.

월곡2동에 56년째 살고 있는 하광용(59)씨는 “월곡동은 무허가 달동네로 시작했다”며 “먹고살기 힘든 주민들을 하나로 이어준 건 익명의 기부자 덕분이었다”고 했다. 익명의 기부자의 쌀 기부에 감명받은 월곡2동 통장협의회 회원들은 매달 1만원씩 갹출해 인근 월곡중학교에 장학금을 보내고 있다. 월곡2동의 한 목욕탕은 매년 어르신들에게 무료로 목욕탕을 개방하고 있다. 월곡새마을금고는 익명의 기부자 쌀 기부가 중단된다는 소식에 추가 성금을 보탰다.

60년째 월곡2동에 살고 있는 김선임(90)씨는 지난 11일 쌀 1포를 받고선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15년째 쌀을 받고 있는 김씨는 “올해도 주민센터에서 쌀을 보내주길래 얼굴 없는 천사 기부가 끊긴 줄도 몰랐다”며 “올해는 이웃들 덕분에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어 정말 감사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