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우에노 공원에 간다. 둘러봐야 할 미술관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도쿄국립박물관, 구로다 세이키 기념관, 도쿄미술대학 미술관, 도쿄도미술관…. 그리고 국립서양미술관 때문이다. 우에노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아주 모던한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프랑스 건축 거장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미술관. 언제나 인산인해다. 미술관 명칭을 대변하듯 서양미술사(史)에 등장하는 주요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기획전이 상시 개최되는데, 공원 입구부터 미술관 현관까지 대기 행렬이 이어진다. 동양에, 그것도 극동에, 그것도 국립기관으로 존재하는 서양미술관이라니.
◇명문가 아들, 성공한 사업가
그 중심에 한 남자가 있다. 마쓰카타 고지로(1865~1950). 국립서양미술관은 그가 수집한 컬렉션을 발판 삼아 1959년 문을 열었다. 그는 태생이 금수저였다. 부친이 메이지 시대 총리대신을 두 차례 역임한 마쓰카타 마사요시. 셋째 아들이던 그는 일찍이 미국 럿거스대·예일대에서 유학하며 서구 문물을 적극 받아들였다. 학업을 마친 후 귀국해 부친의 비서관 등을 지낸 후, 1896년부터 가와사키 조선소(현 가와사키 중공업) 초대 사장으로 일했다. 당시 조선업은 전쟁으로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고, 불과 몇 년 새 천문학적인 성과급을 받게 된다.
그 돈으로 그는 미술품 구매에 열을 올렸다. 전해지기로는 그가 당시할 수 있던 돈은 3000만엔, 현재 가치로 약 3000억원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유럽 미술의 근대성을 강하게 드러내던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걸작을 다수 사들였다. 마네·모네·드가·세잔·고흐·로댕…. 1916년부터 그가 머물고 있던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본인의 컬렉션을 형성하기 위해 예술가와 화상을 자주 만났는데, 벨기에 태생의 영국 화가이자 판화가·디자이너 프랭크 브랭귄도 그중 하나였다. 일본 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인 브랭귄은 곧 그와 가까운 친구가 됐고, 컬렉션에도 큰 도움을 줬다. 마쓰카타가 도쿄에 세우려 했던 ‘교라쿠(共樂) 미술관’을 설계하기도 했다.
미술관을 열려는 그의 계획은 취미 때문이 아니었다.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누구나 걸작을 보고 즐기게 하려는, 일종의 애국심 때문이었다. 특히 ‘수련’ 그림을 얻기 위해 1921년 프랑스 인상파 거장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 작업실을 직접 방문한 일화는 유명하다. 한 번도 거장의 그림을 실물로 접한 적 없는 고국의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곡진히 설득했고, 열정에 탄복한 모네는 그가 원하는 그림을 다 내주었다고.
마쓰카타는 프랑스 정부가 국립장식미술관 문으로 쓰기 위해 로댕에게 주문했다가 계약을 파기해 석고 상태로 방치돼 있던 ‘지옥의 문’을 브론즈로 주조하는 비용을 부담하기도 했다. 남아 있는 계약서에 60만프랑(약 142억원)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적혀 있다. 마쓰카타 덕분에 ‘지옥의 문’은 청동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지금 국립서양미술관 입구에 서 있는 ‘지옥의 문’은 같은 틀에서 주조된 작품. 여담이지만 삼성문화재단이 이 ‘지옥의 문’ 7번째 에디션을 소장하고 있다.
◇파산, 화재… 컬렉션의 흥망성쇠
마냥 번창할 것 같던 사업은 그러나 1927년 세계 대공황 여파로 큰 타격을 입었다. 조선소는 파산했고, 도쿄에 세우려던 미술관 계획을 접어야 했으며, 부채를 갚기 위해 주요 소장품을 처분하기에 이른다. 소장품에는 소장자의 삶의 궤적이 종종 남는다. 마쓰카타가 소장했던 안드레아스 리초스의 15세기 이콘화가 그런 예다. 나무 패널 위에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진 ‘헤토이마시아와 함께한 그리스도의 승천’이라는 작품은 은행에 압류됐다가 1930년 경매에 등장했고 한참 뒤인 1973년 국립서양미술관이 다시 매입한 경우다. ‘엑스(ex·예전) 마쓰카타 컬렉션’으로 분류돼 있다. 이런 식으로 담보로 잡힌 작품들은 여기저기 팔려나갔다.
게다가 1939년 런던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던 1000여 점의 소장품을 화재로 잃는 비운까지 겹쳤다. 불행 중 다행은 프랑스에 보관하던 작품 400여 점은 일본의 2차대전 패전 뒤 전범국의 배상 책임을 물어 모두 프랑스 정부에 귀속됐다는 것이다. 타국에 남을지언정 적어도 사방에 뿔뿔이 흩어지지는 않게 된 것이다. 마쓰카타는 그토록 열망하던 미술관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1950년 오사카에서 사망했다. 그의 나이 85세였다.
이듬해 일본 정부는 마쓰카타 컬렉션이 개인의 재산임을 강조하며 반환을 요청했다. 프랑스 정부는 양국 우호 회복의 표시로 모네·고흐·쿠르베·세잔 등의 걸작 14점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소장품을 돌려주는 방침을 승인했다. 마침내 196점의 그림, 80점의 드로잉, 26점의 판화, 63점의 조각을 포함한 370점이 일본으로 향했다. 다만 ‘반환’이 아닌 ‘기증’ 형식이었고, 프랑스인에게 미술관 건축을 맡겨야 한다는 조건이 걸렸다. 그렇게 국립서양미술관은 1959년 개관했다. 1960년 개관 1주년을 맞아 마쓰카타 컬렉션 중 걸작을 엄선한 기념전이 열렸다. 전시가 열린 두 달간 방문객이 8만명을 넘겼다.
◇인상주의 걸작의 향연
서양 인상주의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대단하다. 일본식으로 변주된 화풍인 외광파(外光派)가 생겨났을 정도. 마쓰카타 역시 인상주의 애호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대표 컬렉션으로는 역시 모네의 1916년작 ‘수련’이 손꼽힌다. 모네는 50세 이후 자택에 일본풍 다리가 있는 정원을 만들고, 연못에 수련을 키웠으며, 그것들을 반복해 그렸다. 모네는 약 250점의 ‘수련’ 연작을 남겼다. 지베르니 정원에서 그려진 ‘수련’ 연작은 날씨와 시간에 따라 표정을 바꾸는 빛과 그 빛을 반영하는 수면의 변화를 담아내기 위한 연작 실험에 가까웠다. 마쓰카타 컬렉션의 ‘수련’은 모네의 말년작에 속한다. 빛을 따라가며 과감하게 붓질을 반복한 말년의 모네 작품에서 추상 미술의 시원이 보인다.
원래는 마쓰카타 컬렉션에 속했으나 지금은 프랑스 파리 오르셰미술관이 갖고 있는 반 고흐의 ‘아를의 방’도 소장자의 안목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노란 집’으로 알려진 아를의 라마르틴 광장 2번지에 있는 고흐의 집 침실을 묘사한 것이다. 고흐는 이 주제로 1888년과 1889년 사이에 세 점의 그림을 그렸다. 마쓰카타는 1889년 9월에 제작된 세 번째 버전을 소장했다. 원래 고흐의 여동생이 소유하던 것을 후에 마쓰카타가 인수했다. ‘아를의 방’은 파리에 남았지만 같은 해 그려진 연분홍 ‘장미’는 국립서양미술관의 중요 소장품으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고흐가 자살하기 1년 전인 1889년 생레미 정신요양원에 있을 때 정원에 핀 장미를 그린 것이다.
르누아르의 ‘알제리풍의 파리 여인’(1872) 역시 마쓰카타 컬렉션의 주요 인상주의 작품이다. 마쓰카타는 이 그림을 1921년의 마지막 날 9만7000프랑에 매입했다. 알제리풍으로 장식된 방에 앉아 있는 매혹적인 세 여성을 그린 이 그림은 실제로는 파리의 한 방에 투사된 상상의 풍경. 르누아르의 초기작에 속하면서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확장하는 미술관
국립서양미술관은 일본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2016년에는 전 세계 7국에 있는 여타 르코르뷔지에의 건축 17건과 함께 묶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참고로 국립서양미술관은 르코르뷔지에가 생전에 완공한 유일한 미술관 건축물이다. 2019년 개관 60주년 기념전 ‘르코르뷔지에와 순수의 시대’를 꼼꼼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이듬해 국립서양미술관은 개관 당시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했던 원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대대적 리노베이션 작업에 들어갔고, 2022년 4월 재개관했다. 로댕의 ‘지옥의 문’과 ‘생각하는 사람’ 역시 개관 당시 놓인 그 자리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이 미술관은 한 사람의 열정과 철학이 국가적 보물이 될 수 있다는 증거다. 후대가 이를 이어받아 유지를 잇는다. 현재는 미국 샌디에이고 미술관과 공동 기획한 소장품 전시가 열리고 있다. 비(非)유럽권에서 유럽 미술품을 수집해 온 대표적 두 미술관의 컬렉션을 함께 비교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 국립서양미술관의 소장품은 계속 확장돼 현재 6000여 점에 이른다. 18세 이하 청소년들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미술로 이루려던 교라쿠(共樂), 즉 ‘함께 즐기자’는 마쓰카타의 꿈은 실현돼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