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이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기소된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에게 유죄를 선고하면서 “비서관이라는 지위로 볼 때 피고인이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고 판결문에 썼다. 청와대의 ‘윗선’이 있다는 뜻이다.
청와대와 환경부가 전 정권이 임명한 인사들을 쫓아내고 자기 편을 꽂아 넣는 과정에서 수시로 보고와 지시를 주고받은 사실이 판결문에서 드러났다. ‘산하 기관 임원 교체 계획’ ‘교체 진행 상황’ 같은 문건도 오갔다. 환경부 공무원은 법정에서 “사실상 청와대가 후보자를 최종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환경부는 청와대 내정 인사의 합격을 위해 자기소개서와 직무계획서를 대신 써주고 면접 점수를 100점으로 고치기까지 했다. 청와대가 아무리 세다고 해도 1급 비서관 말만 듣고 조직적 불법을 저지를 부처 공무원은 없을 것이다.
당시 동부지검 수사팀은 공소장에서 청와대가 공공 기관 임원 내정 때 조현옥 전 인사수석이 주재하는 ‘인사간담회’를 열어 단수 후보를 정한 뒤 환경부에 통보했다고 했다. 다른 청와대 수석들도 참석한 회의였다. 이 간담회 자료를 포함한 블랙리스트 증거를 찾으려고 검찰이 청와대 압수 수색을 시도했지만 영장이 전부 기각되면서 조 전 수석을 부르지도 못했다. 오히려 수사팀이 인사 학살 당했다. 수사 라인인 지검장과 차장, 부장검사가 모두 인사 불이익을 받고 사표를 내야 했다. 실무 검사들은 지방으로 좌천됐다. 정권이 청와대 윗선 수사를 방해한 것이다.
당시 환경부 전 장관 구속 영장을 기각한 판사는 “최순실 일파의 국정 농단으로 공공 기관에 대한 인사권과 감찰권이 적절하게 행사되지 못한 사정이 있다”고 했다. 같은 행위를 해도 전 정권이 하면 구속이고 현 정권이 하면 불구속인가. 어떻게 법관이 법리적 결정문에 ‘최순실 일파' 같은 비법률적이고 정치적인 표현을 쓸 수 있나. 그런데 정권의 표적 감사를 받고 쫓겨난 환경공단 상임이사는 ‘최순실 일파’나 ‘국정 농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블랙리스트 찍어내기의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운동권 출신이라는 이 판사는 “새 정부가 공공 기관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인사 수요 파악 목적으로 사직 의사를 확인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판사가 아니라 청와대 변호사 같은 모습이다. 법원도 윗선 수사를 방해한 것이나 다름없다.
청와대는 환경부 전 장관이 법정 구속됐는데도 “판결문에 ‘블랙리스트’ 단어가 없다” “문재인 정부에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 있다. 윗선과 배후 수사를 막아놓고 궤변을 계속하는 것이다. 법원 판결문처럼 청와대 비서관이 단독으로 블랙리스트를 짜고 실행을 결정할 수는 없다. 공공 기관 인사 책임자인 인사수석과 검증 책임자인 민정수석은 소환조차 안 됐다. 이처럼 윗선 수사가 막혔는데도 법원이 블랙리스트 관련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한 것은 전모를 제대로 밝히라는 의미일 것이다. 직권 남용의 공소시효가 7년인 만큼 얼마든지 추가 수사와 재수사가 가능하다. 끝까지 추적해 전모를 밝혀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