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 우편함에 편지가 한 통 와 있었다. 베를린조형예술가협회에서 온 것이었다. 내용인즉, 예술가들에게 긴급 지원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이 편지는 코로나 사태 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메일로 처음 왔고, 이후 두세 차례 지원금 규모가 확대돼 다시 통보됐다.

일사일언 삽입 일러스트 예술가

지원금 액수는 3200유로(약 430만원) 정도였다. 내가 놀란 이유는 금액이 아니라, 지원금 수령의 대가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돈만 받고 아무 것도 안 해도 되는 것이다. 절차도 매우 단순했다. 형편이 어렵다는 증거로 재산 내역 정도만 제출하면, 구구절절 내 처지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외국인임에도 베를린에서 거주·활동하는 확인된 예술가라는 사실만으로 지원금 지급 대상에 포함돼 있었다.

이곳에 살면서 체감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인식은 조금 특별하다. 통일 뒤 적극적으로 여러 나라의 미술인들을 받아들여 구축한 예술 도시의 정신, 또는 감성이 정책이나 시민 의식 속에 꽤 우선 순위로 자리한다는 느낌이다. 동독과 서독이 체결한 통일 조약에 ‘Kulturstaat’(문화국가)를 명시한 것만 봐도 이들이 예술에 어느 정도로 진심인지 가늠할 수 있다. 베를린에만 갤러리 300여 개와 크고 작은 미술관 170여 개가 있으며, 협회에 등록된 전 세계 미술 작가만 1만명이 넘는다.

모두에게 힘든 시기, 미술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많은 기회와 훌륭한 조건을 제시한다고 모든 작가가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와 한발 떨어져 있는 듯한 미술이라는 문제를 위해 의회와 예술가협회가 만나 의논하고, 모든 회의 내용을 회원에게 공개하고, 조건 없는 지원을 결정하는 등의 과정을 보면서 베를린이 왜 예술의 도시가 됐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다만 안내문에는 부정한 방식으로 지원금을 받은 경우 연방 검찰의 조사 및 기소가 진행된다는 내용의 경고도 담겨있었다. 전례가 있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