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용감한 항전이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가슴 벅찬 뉴스를 보며 몇몇 우크라이나 작가가 떠올랐다. 대부분 러시아 작가인 줄 알지만 알고 보면 우크라이나 출신 작가다. 첫째는 단연 카지미르 말레비치(1879~1935)다. 마침 그의 대표 작품을 모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혁명의 예술’ 전시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어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생생하게 본 덕분이기도 하다. 전시회의 제목처럼 말레비치는 일반적으로 러시아 예술가로 여겨지지만 그의 고향은 항전 중인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키예프)다.
당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 치하의 한 행정구역이었고, 그가 고향을 떠나 러시아 제국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니 그를 러시아 예술가로 소개하는 것도 무리는 없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활동에서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선언한 우크라이나의 국민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원과 사각형만을 사용하는 기하학적 추상은 말레비치의 대표작이다. 인물이나 풍경 등 현실 세계의 무언가를 재현하거나 연상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 된다는 ‘절대주의’ 이론이다. 부르주아를 위한 초상화나 장식으로 전락한,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 예술이 아닌 현대적인 그림들은 처음에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정부의 찬사를 받았지만,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현대미술은 스탈린 시대를 맞이하자 곧 비난 대상이 되었다. 추상화는 금지되었고, 말레비치는 교수직을 박탈당한 채 정부 지침대로 일하는 농부와 노동자를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했다.
흥미로운 반전은 1935년 57세로 숨을 거둔 말레비치의 장례식에서 일어났다. 암으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 수 있었던 작가는 장례식을 준비했다. 자기 작품처럼 관을 사각형으로 만들었고, 대표작인 검은 사각형 그림을 자기 주검 위에 걸도록 지시했다. 그 옆에는 사실적 재현 기법으로 그린 자화상을 걸었지만, 얼굴 아래 오른쪽 하단에는 검은 사각형을 작게 넣어 사인을 대신했다. 비록 스탈린 정부의 명령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추상을 놓을 수 없었던 작가의 소심한 반항이 새겨진 ‘웃픈’ 장례식이었다. 그가 떠난 후 작품은 폐기될 위기에 처했지만, 큐레이터들이 그의 작품을 미술관 수장고에 몰래 숨겨놓아 지금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작품이 남은 덕분에 그의 활동은 서방으로 알려질 수 있었다. 미국 중심으로 미술사를 쓸 때는 외면당했지만, 냉전 시대가 지나자 재평가를 받고 있다.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은 2014년 그의 회고전을 기획하며 영국에서 활동 중인 유명 건축가 자하 하디드의 해석을 더했다. 그녀는 말레비치에 대한 연구로 졸업논문을 쓸 정도로 큰 관심을 가져왔고, 그의 추상화를 자신의 건축에 적용했다. 말레비치의 예술이 화가뿐 아니라 건축가에게도 큰 영향을 준 것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디드는 한국에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진 바로 그 건축가다.
또 다른 우크라이나 작가는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두 번째로 큰 도시 하르키우 출신으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 치하에 있을 때 출생했다. 모스크바에서 학교를 다녔지만, 예술적 기반을 다진 건 우크라이나의 항구도시 오데사였다. 타틀린은 말레비치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작가들과 함께 전위 예술 운동에 참여했다. 피카소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무작정 파리로 찾아가 버티던 시절, 그의 전시회를 본 평론가들이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아방가르드’ 미술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으니, 당시 타틀린은 누구보다도 대표적인 우크라이나 작가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타틀린의 대표작은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다. 볼셰비키 혁명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높이 396m의 파리 에펠탑보다 높은 타워를 지어 맨 위에는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는 사무실과 방송국을 넣는다는 계획이다. 1층은 매년, 2층은 매월, 3층은 매일 한 바퀴를 회전하도록 한다는 야심 찬 계획도 추가했다. 지금의 기술로도 과연 이런 건물을 지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작품은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약 5m 높이 모형을 전시한 사진이 남아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니멀리즘의 대표적인 미국 작가 댄 플래빈은 자기 작품에 이 제목을 넣었고,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 중인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는 이 작품의 형태에 화려하게 빛나는 샹들리에를 단 작품을 제시하여 실패한 유토피아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추모했다. 타틀린의 모형은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미술관에서, 아이웨이웨이의 오마주 작품은 아부다비 루브르 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후대 예술가들을 통해 끊임없이 회자되는 말레비치와 타틀린의 꿈은 비록 현실에서 꽃피우지 못했다고 하여도,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과거의 씨앗이 미래에 꽃피는 것이 역사다. 미술에서는 이렇게 시대를 앞서나간 예술가를 ‘아방가르드(avant-garde)’라고 부른다. 전위 부대라는 군사 용어에서 가져온 말이다. 맨 앞에서 진군하며 가장 먼저 총과 지뢰를 맞아 죽을 확률이 높지만, 덕분에 뒤따르는 사람들은 방향을 탐지할 수 있다. 지금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목숨을 걸고 자유의 가치를 수호하고 있고, 강자에게 용감하게 맞서는 약자를 위해 세계의 많은 이가 응원을 전하고 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추모하며, 그들의 오늘은 후대에 길이 남는 대단한 역사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