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드라마 ‘파친코’는 재미 한국인 이민진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일제 강점기 고국을 떠나 일본으로 떠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조선인과 돼지만 살 수 있는 곳’이라 비하하는 더러운 빈민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고, 정부 규제로 일본인들이 떠난 도박의 세계 파친코를 접수하며 일본 경제로 침투한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때로는 피해자가 되기도 하지만 도전 정신을 잃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강렬한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집약적인 문장은 2019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의 전시 제목이기도 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진 여성국극(모든 배역을 여성 출연자들이 맡아서 공연한 창극)을 다룬 정은영 작가, 월북한 천재 무용수 최승희를 조명하는 남화연 작가, 태어나자마자 여자라는 이유로 버려진 바리데기 신화를 다룬 제인 진 카이젠 작가가 참여했다. 소설 파친코 등장인물들이 보이는 주체적이고 단단한 태도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작품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세 여성 작가 정은영, 남화연, 제인 진 카이젠의 삶과도 맞닿아 있어 보인다.
비엔날레가 열리는 베네치아는 운하가 흐르고 차 대신 배가 다니는 독특한 수상 도시이자 철저히 인공적인 섬이다. 외부의 공격을 피해 늪지대 위의 작은 섬으로 필사적으로 탈출하며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은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길이 25m 이상의 나무 말뚝을 땅에 박는 간척사업으로 토지를 넓혀 나갔다. 안개에 가려 숨어 있기 안성맞춤이었던 작은 섬은 점점 거대한 도시로 변모했고 828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몰래 성 마르코의 유해를 옮겨오는 데 성공하자 도시는 더욱 유명해졌다. 이를 기념하며 지은 성 마르코 대성당은 지금도 베네치아의 랜드마크로 남아있다. 이후 해상 무역을 바탕으로 막강한 부를 축적하면서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도박에도 눈을 뜬다.
도박판을 벌인 사람들은 부유한 귀족 상인들이었지만 이곳에 종사하는 이들은 바르나보티(Barnabotti)라 불리는 몰락한 귀족 계급이었다. 천박하다고 멸시받지만 막강한 자본을 움직이기에 버릴 수 없는 황금 사업이라는 점, 차별받는 하층 계급이 종사하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카지노는 파친코와 오묘하게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도심 외곽의 저렴한 바르나에 살아서 바르나보티라 이름 붙여진 이들은 같은 민족이었지만 천대받는 존재였다. 한번 귀족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 버려지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은 있었지만, 재산이 없었고, 그렇다고 평민들의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기에 가난은 되풀이되었다. 정부 지원금에 의지해 근근이 살아나가던 이들은 베네치아 공의회가 1638년 카니발 기간에만 허용하는 세계 최초의 합법적 도박장(Ridotto)을 개설하자, 검은색 긴 옷을 입고 테이블을 오가며 딜러로 돈을 벌었다. 이후 합법적 도박장도 폐쇄되자 소규모로 부자들의 작은 저택(casa/casino)에 모여 도박을 이어갔는데 ‘카지노’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베네치아가 세계 최초로 비엔날레를 연 것은 관광을 통해 다시 한번 도약할 기회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 들어 무역의 중심을 포르투갈에 뺏기고, 19세기에는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힘을 잃고 이빨 빠진 사자 신세가 된 베네치아는 1895년 이탈리아 황제 부부의 은혼식을 기념하며 격년마다 개최되는 비엔날레를 개최한다. 1회 대회에는 7개 국가만이 참여하였으나 오늘날 약 60여 국 2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세계적인 미술 전시회로 성장했다. 미술, 건축, 음악,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장르로 확장되었으며 예술의 올림픽이라 불린다. 여기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은 곧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한국 영화의 붐이 대표적인 예다. 봉준호 감독이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상을 받자, 바통을 이어받듯 윤여정 배우가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윤여정은 파친코에도 출연하며 세계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다.
미술 분야도 다르지 않다. 1995년 국가관이 설립된 초기에 참여한 전수천, 강익중, 이불 작가는 특별상을 타며 입지를 다졌다. 뿐만 아니라 2007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특별전 이우환 개인전은 일본 나오시마섬에 이우환 미술관을 설립하는 도화선이 되었고, 2015년 열린 단색화(Dansaekhwa) 특별전은 한국 추상미술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를 세계에 각인시키며 한국 미술 시장의 세계화를 견인했다. 여기에 참여했던 박서보 작가는 올해에도 이사무 노구치와의 단체전으로 베네치아 비엔날레(4~11월)에 참여하고, 단색화 특별전이 열렸던 팔라초 콘타리니 폴리냑에서는 올해 전광영 작가의 특별전이 개최된다. 전시장 가든에는 건축가인 스테파오 보에리의 ‘한지 하우스(hanji house)’가 설치되어 더욱 주목을 끌 예정이다. 그는 올해 동시에 개최되는 밀라노 트리엔날레(5~11월)의 총감독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밀라노 디자인위크(6월), 바젤 아트페어(6월), 카셀 도큐멘타(6~9월) 등 팬데믹으로 연기되었던 수많은 미술 행사들이 동시에 개최되면서 팬데믹으로 잠시 멈칫했던 미술계가 다시 한번 세계화를 이루며 주목받는 계기가 될 것이다.
변방으로 몰린 이들이 만든 작은 섬에서 무역의 도시로, 쇠락한 도시에서 다시 세계적인 관광지로 거듭난 베네치아의 역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변신하며 살아남는 파친코의 스토리를 다시 한번 연상케 한다. 세계의 모든 이들이 한국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파친코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이 보편성에 있을 것이다. 역사를 이겨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시대를 뛰어넘어 미래에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 한국 예술인들도 한국을 넘어 세계로 더욱 도약하기를 마음 깊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