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즌, 올해의 주요 이슈를 정리하고 새해를 예측하는 다양한 분석이 주목받고 있다. 이럴 때마다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카산드라다.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위험을 예고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아 결국 패망하게 된 트로이의 공주다. 예지력을 얻게 된 건,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아폴론 덕분이다. 예지력을 주면 사귀겠다고 하여 놀라운 능력을 얻어냈지만 아폴론의 마음을 받아주지는 않았고, 화가 난 아폴론은 아무도 그녀의 예측을 믿지 않는 저주를 내린다. 결국 그녀의 예지력은 설득력을 갖추지 못해 반쪽짜리가 되고 만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커뮤니케이션의 핵심도 같은 맥락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소피스트들이 주장을 펼치면 가장 많은 시민의 표를 얻은 이의 주장이 채택된다. 오늘날의 정치와 같다. 한데 이때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 즉 로고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청자는 자신의 감정, 즉 파토스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에, 로고스보다는 파토스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이 신뢰할 만한 사람이냐는 점, 즉 에토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 마을에 살며 서로 빤히 아는 작은 고대 마을이 아닌, 현대 도시 사회에서도 이것이 통할까? 지금 우리는 화자 개개인의 개인적 품성이나 신뢰성을 알아볼 겨를이 없다. 권위와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세계에서 옳은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억울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우리는 이를 카산드라 신드롬이라 부른다. 통찰력은 있지만 조리있게 잘 설명하지 못하거나, 약자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너무 먼 미래로 앞서 나가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거나, 심지어 그 분야의 전문가라 하여도 대중적 명성이 없다면 도리어 인플루언서의 강력한 주장에 밀리기도 한다. 최근의 이태원 사고도 이를 예측하고 경고한 목소리가 있었지만 마치 카산드라의 외침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혼란스러운 시기, 어디에서 더 신통한 점괘를 들을 수 있을지 여러 세미나와 리포트를 기다리기 전에, 과거의 데이터 다시 말해 역사와 고전을 돌아보며 스스로 미래를 예측해보는 것은 어떨까? 시대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인간의 속성이 변치 않기에 반복되는 묘한 패턴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예술은 시대를 반영할 뿐 아니라 미래를 예지하는 속성이 있어, 혼란의 시기를 넘길 때 예술가들이 어떤 작업을 펼쳤는지를 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흥미롭게도 2020년대는 1920년대의 데자뷔라 할 정도로 유사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전염병으로 마스크를 쓰고 다니질 않나, 전쟁이 일어나는 등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낯선 현재, 딱 100년 전에도 1,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이성과 논리,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낙관적 기대가 단번에 무너졌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반성, 꿈, 무의식, 우연, 상상, 유머 등 비과학적이라 여겨진 것들을 다시 돌아봐야 겠다는 각성, 그것이 불러일으킨 예술이 바로 1920-1930년대를 풍미한 ‘초현실주의(SURREALISM)’다. 늘어지는 시계를 그린 살바도르 달리, 하늘은 맑은데 땅은 밤인 묘한 이미지의 마그리트 등이 대표적인 작가다. 올해 개최된 베네치아 비엔날레도 테마를 ‘초현실주의’로 제시하며 상상과 재해석의 힘을 통해 불가항력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작품들을 주로 소개했다.
1940년대,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은 더 문제였다. 신체 일부를 잃거나 얼굴을 크게 다친 용사들이 마을로 돌아왔고, 예술가들은 시대의 상처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거친 표면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누구에게 따지고 물을 수도 없는 분노,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이 반영된 작품들로 비정형이라는 뜻의 ‘앵포르(INFORMEL)’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편에서는 제대로 된 미술 재료를 구할 수 없으니 버려진 문짝이나 폐품을 주워 붙여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미국에서는 이를 여러 가지를 결합한다는 뜻에서 ‘콤바인 아트(COMBINE ART)’로, 프랑스에서는 ‘아상블라주(ASSEMBLAGE)’로 불렀고, 이태리에서는 가난한 미술이라는 뜻에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라고 부르기도 했다. 엄청난 크기의 천을 아예 바닥에 깔아놓고 물감을 사방에서 뿌리며 내면의 강렬한 에너지를 표출시키거나, 큰 붓자국을 휘두르는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SM)가 1950년대를 풍미했다. 일부 관객은 자신의 키보다 훨씬 거대한 작품 앞에서 숭고함을 느끼기도 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전쟁의 상처가 가라앉고, 재정비한 공장에서 산업 생산품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자 밝고 예쁜 예술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팝아트(POP ART)다.
오늘날 한편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서, 얼굴에 큰 화상을 입거나 팔 다리를 다친 사람을 거리에서 보는 일은 흔하지 않다. 설사 그런 사고를 당했다 해도 의료 기술로 최대한의 복원을 꾀한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공황장애’라거나 ‘트라우마’라는 단어는 자주 들려온다. 겉모습보다 마음을 다친 사람이 많은 시대다. 게다가 세계화가 종식되고 갈등의 시대에 접어든 것마저도 지난 세기의 복사판 같다. 지난 프리즈 아트페어에서 다 팔렸다거나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품들은 대체로 정교하고 빈틈없는 그림보다는 거칠고 그로테스크하거나, 반대로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유치하고 순수한 작품이 많았다. 거대한 화면에 낙서하듯 그리며 제약을 뛰어넘는 자유로움을 보여주는 작가도 있다. 대표적으로 줄리 머레투는 유압사다리에 올라 그릴 정도다. 그림이란 아릅답고 적당한 크기여야 한다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이런 작품의 효용은 공간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치유의 영역에 가깝다. 최근 신작을 낸 제러미 리프킨은 이제 효율의 시대가 아닌 회복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성공했지만 공허한 수퍼리치,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해 정신적 풍요를 누린다는 사람들, 저마다 추구하는 가치와 행복의 기준이 다양해진 시대, 정서적 안정과 마음의 성장은 어려운 시대를 회복하는 원천이다. 2023년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힌트는 바로 이 대목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