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 최경주(왼쪽)와 청각장애 선수 이승만이 15번홀에서 티샷을 하기 직전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승만아, 나 오늘 저녁 비행기로 미국에 돌아간다. 9월에 열리는 신한동해오픈 때 다시 보자."

최경주(36)가 18번홀 그린에서 마지막 퍼팅을 남겨놓고, 같은 조로 경기를 한 이승만(26)에게 다가갔다. 이승만은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2급 청각장애 골퍼. 장내 아나운서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갤러리들이 힘찬 박수를 쳐주는 데도 멀뚱히 서 있다가 캐디가 손짓, 눈짓으로 알려주자 그제야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던 참이었다. 이승만은 뭐라고 대답을 하는 듯 했고, 최경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승만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이승만은 이날 2번홀에서 티샷을 OB내면서 더블보기를 범해 경기 초반부터 흔들렸다. 그때도 최경주는 허리를 툭툭 쳐주며 입 모양과 눈짓으로 무언가 말을 전하려 했다. 나중에 최경주가 웃으면서 밝힌 '대화' 내용은 "힘 빼, 이 친구야. 아무리 힘 써도 아직 나만큼은 못 나가"였고, 이승만이 이해한 대화 내용은 "마음을 비워. 이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였다. 이승만의 최종성적은 3언더파로 미셸 위와 같은 공동 35위.

최경주와 이승만은 흔히 '멘토(mentor)'와 '멘티(mentee)'의 관계라고 한다. 말하자면, 최경주가 이승만의 스승이자 후견인인 셈이다.

이승만은 애초에 '소리 없는 세상'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승만에게 "움츠러들지 말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며 여덟 살 때부터 골프를 가르쳤다. 이승만은 타고난 집중력으로 괄목할 만한 성적을 보이기 시작했고, 천안북일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9년 1월, "제2의 타이거 우즈가 되겠다"며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막상 맞닥뜨린 세계 골프계의 정상은 정상인도 넘보기 힘들 만큼 높고 두터웠다. 좌절과 실의에 빠져 방황하던 2003년 이승만 앞에 나타난 구세주가 최경주였다. 따뜻한 위로의 말과 함께 "우선 아시아 투어에서 경험을 쌓으라"며 2만달러의 경비까지 선뜻 내놓았다. 이때 이후 최경주는 틈나는 대로 이승만을 챙겼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성적이 신통치 않다는 이유로 골프용품 회사가 이승만에 대한 후원 약속을 소홀히 하면 최경주가 대신 나서서 항의하기도 했다.

이승만이 지난해에 성적이 좋지 않아 아시아프로골프 퀄리파잉 스쿨을 다시 치르게 되자, 최경주는 또다시 소요 경비를 모두 대줬다. 그 덕분에 이승만은 지난 2월 호주에서 열린 유럽프로골프(EPGA) 조니워커클래식에 출전해 최경주를 다시 만날 수 있었고, 최경주는 호주에 머무는 8일 내내 이승만과 저녁자리를 함께했다. 이승만의 아버지 이강근(57)씨와 어머니 박숙희(51)씨도 함께 모셔 기운을 북돋았다.

이승만은 출국을 앞둔 최경주에게 "다가오는 US오픈에서 우승하시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해달라고 했고, 최경주는 "내 영향력이 남아있는 한 승만이가 불이익을 당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내가 정신적 의지가 되고 모델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답을 남기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