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에서 주인공이 미쳐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작곡가들이 한때 유행처럼 오페라에 미친 사람을 등장시켰는데, 그건 '미친' 상태가 되면 성악적인 기교를 모두 시도해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루치아란 이름엔 빛이라는 뜻이 있거든요. 우리나라로 치면 '광자(光子)' 정도 되겠지요?"

"옛날 스코틀랜드에선 가문(家門)마다 고유의 체크무늬를 갖고 있었어요. 체크무늬를 기준으로 보면 요즘 우리나라엔 오로지 두 가문만 있지요. '버버리' 가문과 '닥스' 가문 말입니다."

박종호씨가 유럽 여행 때 자주 가면 음반 매장을 벤치마킹해서 만든 클래식 음반 전문매장 '풍월당'.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사랑방 역활을 하고 있다.

지난 월요일 저녁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음반가게 '풍월당'에서 정신과 의사이자 오페라 평론가인 박종호씨(48)가 도니체티의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공연 실황을 보여주며 강의를 했다. 결혼 첫날밤 신부가 신랑을 칼로 찔러 죽인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이 오페라의 원작이다.

이날 강의는 포스코이구택 회장과 윤석만 사장, 이운형 세아제강 회장과 이순형 세아 홀딩스 부회장 등 기업인 부부 약 40명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자리였다. 누군가 "아이고, 쇠쟁이들이 오페라는 무슨 오페라야"라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

최근 오페라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었다. 주변에서 '출장 가서 봤다''책 읽었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오페라 강의를 들으며 공부한다는 사람도 꽤 생겼다. 이상한 건 오페라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대부분 '박종호'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오페라를 너무 좋아해서 강의하고 책 쓰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음반가게까지 차린 정신과 의사'라고 했다.

취미생활에 광적으로 몰두하다가 의사란 본업보다 취미인 오페라 쪽으로 더 유명해진 사람이란 인상 때문에 무의식 중에 약간 정신 나간 정신과 의사를 기대하며 그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빈틈없는 옷차림에, 자신은 전혀 웃지 않으면서 농담을 툭툭 던지는, 요즘 말로 하자면 좀 까칠한 정신과 의사였다.

그의 오페라 강의도 분위기가 비슷해서 차분하고 싸늘하기까지 했다. 그는 열강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두 시간쯤 듣고 나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오페라가 워낙 격정으로 차고 넘치는 장르인지라 강사까지 흥분해서 설치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서울 청담동에 있는 그의 병원은 카페처럼 예뻤다. 그가 건넨 명함은 더 세련되고 감각적이었다. 손으로 흘려 쓴 이름이 푸른색으로 찍혀 있었다. 그 명함은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맞추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불멸의 오페라'는 오페라 백과사전에 가깝던데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읽으라는 책은 아니지요. 원래 그 책의 용도는 세 가지 정도 됩니다. 뜨거운 냄비를 올려놓거나 높은 데 있는 물건을 꺼낼 때 밟고 올라서도 되고요. 아니면 한밤중에 남편을 쳐죽일 때도 쓸 수 있어요."

나는 킬킬거리는데 그는 무표정했다. 그를 만나기 전 그가 쓴 책을 일곱 권 샀다. 그중 각각 1000쪽에 달하는 '불멸의 오페라' 1, 2권은 값도 값이지만 너무 두꺼웠다. 책의 무게만으로도 오페라에 대한 그의 사랑이 취미를 넘어 어떤 경지에 이르렀다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그 책을 펼치기만 하면 순식간에 놀라운 오페라의 세계로 빠져들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약간 질렸고 곧 지루해져서 덮어버렸다. 그를 만난 후에 다른 사람이 수십 년 고민하고 정리한 내용을 몇 시간 만에 꿀꺽 삼키려 한 내 욕심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클래식 음악과 유럽여행에 관한 그의 다른 책들은 술술 읽혔다.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에 대해 얼마나 공부하면 책을 그렇게 많이 쓸 수 있지요?

"30년쯤 공들인 결과지요. 불멸의 오페라는 자료 준비하는 데 10년, 책을 쓰는 데는 반년쯤 걸렸어요. 뿌듯해요. 사실은 제가 의대 다닐 때 공부하기 싫으면 늘 클래식 음악을 들었거든요. 남들이 보면 '놀이'이고 '취미'에 불과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걸 아주 오래, 진짜 열심히 했어요. 그랬더니 요즘은 사람들이 저를 부러워하면서 오페라 강의를 해달라고 해요."

―오페라는 얼마나 자주 보시나요?

"요즘은 거의 안 봅니다. 이젠 오페라가 제게 놀이가 아니라 일이니까요. 강의할 때 늘 오페라 실황을 학생들과 같이 보니까 따로 보게 되진 않아요."

―오페라를 안 보고는 하루도 못 사시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알려져 있지요. 사람들은 제가 오페라에 미친 남자인 줄 알아요. 인생을 완전히 오페라에 쏟아 붓는 줄 알아요. 아닙니다. 저는 오페라 없이도 잘 살 수 있어요."

―한창 빠져있던 시절엔 달랐겠지요.

"물론이죠. 한때는 오페라가 제게 마약이고 도피처이고 탈출구였어요. 사람들에겐 누구나 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며 힘들게 사는 시절이 있지 않습니까? 의과대학 다니고 수련의 하던 때 제가 그랬어요. 어떤 사람은 그 스트레스를 테니스로 풀고, 또 어떤 사람은 사우나로 풀겠지요. 저는 오페라로 풀었어요. 오페라 공연 녹화된 걸 보고 있으면, 화면은 세상의 모든 일을 가려주고 음악은 세상의 모든 소음을 덮어줬어요. 오페라에 푹 빠져서 내가 주인공인 양 한바탕 휘젓고 나오면 스트레스가 풀렸어요."

―요즘은 오페라도 안 보신다면서 스트레스를 어떻게 풉니까?

"제가 하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글 쓰고 강의하고 환자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진료하지 말고 오페라 강의만 하라고 해요. 환자 진료는 한 번에 한 명씩밖에 못 하지만 강의는 수십, 수백 명을 대상으로 할 수 있으니까 제가 사회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거지요. 실제로 제 오페라 강의를 들으며 사는 시름을 잊는다는 분들이 있거든요. 저는 강연을 하면 진료할 때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고 진료할 땐 강연하며 받은 스트레스가 풀려요. 그래서 따로 스트레스를 풀고 말고 할 일이 없어요."

박씨는 예술의 전당과 성남아트센터 등에서 오페라 강의를 한다. 이 외에도 '마리아 칼라스 소사이어티''클럽 카루소' 등의 오페라 동호회 강의도 한다.

박씨의 병원 책상 위엔 유럽 골동품 시장에서 샀다는 고색창연한 모래시계가 놓여있다. 예전엔 시간을 정해놓고 환자와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에게 이런 시계가 필수품이었다고 한다.

―오페라를 즐기고 좋아하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본업도 아니면서 책 쓰고 강의까지 하려면 엄청난 축적과 관리가 있었다는 뜻이잖아요?

"지난 20~30년 동안 정말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제 생각을 만들어왔어요. 때론 고생고생하며 이탈리아 시골 구석까지 찾아가 오페라 공연을 보지요. 한밤중에 생전 처음 가본 컴컴한 시골길에서 헤매다가 가까스로 호텔을 찾아 어두운 방에 들어설 때면 힘들고 무섭고 외로워요. 제가 쓰는 책은 그런 고독의 결과입니다. 브람스는 '자유를 원하면 고독을 감수하고, 고독을 원치 않으면 자유를 포기하라'고 했어요. 저는 고독하지만 자유롭게 삽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시겠군요.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턴 혼자 삽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요. 누님 집에 잠깐 가신 것 같기도 하고."

―책을 보니 어머니의 존재가 아주 크고 무겁게 느껴지던데요.

"어머니가 양장점을 했는데 늘 제가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셨어요. 피아노도 배웠고 그림도 배웠지요. 음반 전집을 사준 사람도 어머니였고요. 그러나 제가 예술을 직업으로 택하는 건 원치 않으셨어요. 먹고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거지요. 그래서 의대를 갔어요. 제가 곁에 있길 바라셨기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 가지 않고 부산에서 공부했어요."

―'마마보이'였나봐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럼 '마마보이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 마마보이'인가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뭐. 누님이 세 분 계신데 어머니에겐 제가 너무나 중요했어요. 말년에 치매에 걸려 고생하셨는데, 어디 계시든 어머니의 마음은 오로지 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모셨어요. 돌아가시기 전 8년을 함께 살았어요. 치매였으니까 어머니의 기억은 점점 사라져갔지요. 그런데 마지막까지 머릿속에 남아있던 유일한 생각은 '우리 아들 밥해줘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아침식사 후엔 아들 점심 먹일 생각, 점심 먹고 나면 저녁 먹일 생각만 하시는 거죠. 언젠가는 전기밥솥에 쌀을 안친 후 그걸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으셨더라고요. 아들 밥해 먹이려고."

―오페라를 혼자 즐겨도 되는데 굳이 강의하면서 퍼뜨리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대학 다닐 때 교수나 선배들로부터 '너는 네 세계가 너무 커서 봉사정신이 부족하다. 왜 더 헌신하지 않느냐'는 꾸중을 많이 들었어요. 봉사하려면 자기를 죽여야 하지요. 휴일에 남을 위해 일하려면 제가 읽고 싶은 글, 쓰고 싶은 글, 하고 싶은 일을 다 포기해야 해요. 그걸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제 마음에 맺혀있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이젠 남들과 나눠야겠다는 생각에 오페라 강연을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럼 일종의 사회봉사 활동이네요.

"제가 청춘을 투자해서 얻은 성과를 수확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거지요. 관객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파격적인 예술작품이 인정받으려면 그걸 이해하고 받아주는 수준 높은 눈이 있어야 하거든요. 우리나라 공연예술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관객의 수준이 낮은 데도 이유가 있어요. 그래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열렬하게 강의하는 거지요."

―어떻게 오페라 강의를 시작하게 됐습니까?

"10년 전 외환위기 직후에 어느 화랑에서 오페라 강좌를 진행해달라고 했어요. 그 전에도 오페라 관련 글을 계속 썼거든요. 경기가 나빠 그림을 사는 사람이 너무 없으니까 화랑을 찾아오는 사람 숫자라도 늘려볼까 했던 거지요. 그 후 강연 요청이 이어졌고 어느 샌가 제 이름이 알려진 거예요. 그러나 오페라는 제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예술의 일부일 뿐이에요."

―오페라가 대중적이긴 힘들지 않은가요. 보러 가기 전에 공부해야 하고 부담스럽잖아요.

"클래식 음악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은 구조적인 것이라서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한번 듣고 이해하기는 어려워요. 제대로 다가가기 위해선 억지로라도 미리 듣고 가는 것이 좋지요. 저는 오페라가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낸 가장 사치스러운 오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 예술, 역사, 문학, 연기가 다 들어 있는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지요. 그런 걸 한두 시간 안에 다 보여주는 것이니 볼 만한 가치가 있어요."

―그렇게 많이 담겨있다는 게 오페라가 부담스러운 이유이기도 하지요.

"오페라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다 가는 이유가 달라요. 어떤 사람은 진짜 감상을 위해, 또 다른 사람은 허영심에서, 또 어떤 사람은 옷자랑 하려고, 또 어떤 사람은 마누라 손에 끌려서 가요. 그래도 다 '감동'이라는 같은 장소에서 만나게 돼 있어요. 골프를 단지 사교 목적 때문에 한다고 해도 운동은 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오페라 줄거리는 왜 다 유치하지요?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졌다가 배신하든지 오해가 생겨서 울고불고 하다가 격정에 빠져서 다 죽어버리더라고요.

"오페라에서 줄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예전에 어느 대기업 회장님이 오페라를 보러 왔는데 비서가 안내책자를 드리니까 '어떻게 끝나는지 미리 알면 재미없다'면서 안 보셨다고 해요. 오페라는 이야기 전개를 보는 것이 아니고 같은 이야기가 음악적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감상하는 겁니다. 그래서 미리 공부를 해두면 감상하는 데 더 도움이 되지요."

―오페라 강의 하신 지 10년 됐는데 그 사이 제일 많이 변한 게 뭡니까.

"10년 전엔 강의하러 가보면 여성들만 앉아 있었어요. 요즘엔 남자들도 많아요. 근무시간에 직장에서 몰래 빠져나와 강의 들으러 오는 사람도 있어요. 지방에서 비행기 타고 오기도 하지요. 제 오페라 강의를 들은 사람이 수천 명 돼요. 외국에 나가보면 오페라 극장 앞에서 제가 쓴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볼 때도 있어요. 오페라가 대중화되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을 느끼지요."

―초보자를 상대로 강의할 땐 어떤 식으로 곡을 고릅니까.

"오래 하다 보니까 나름대로 순서가 생겼어요.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와 '리골레토'로 시작해서, 도니체티, 벨리니, 로시니, 푸치니의 작품을 공부하고, 그 후엔 프랑스독일 작곡가로 가지요. 1년에 30개쯤 소개하는 정도로 스케줄을 짜요."

―오페라 강의에선 뭘 가르치는 거지요?

"음악에 관한 것만은 아니에요. 미술도 알아야 하고 복식사도 알아야 해요. 풍속사, 역사, 신화, 문화, 지리도 알아야 해요. 제가 여행 갔을 때 찍었던 동영상도 보여주고 원작 소설도 읽어주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을 하지요. 오페라를 소재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겁니다. 전방위적인 교양강좌라고 할까요. 보통 사람들이 성악을 할 것도 아니고 오페라 하우스에 취직할 것도 아니잖아요."

그의 진찰실 한쪽 벽엔 CD와 DVD 등 오페라와 클래식 음악 자료들이 가득 담긴 붙박이장이 있다. 소장하고 있는 음반은 모든 종류를 망라해 약 1만2000장 정도이고, 오페라 관련 책만 500권이다.

―몇 년 전에 의사를 때려치우고 '풍월당'이란 음반가게를 한다고 화제가 됐었지요.

"풍월당을 하려고 병원 일을 쉰 건 아니었어요. 좀 쉬고 싶어서 진료를 하지 않는 동안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한 거지요. 풍월당은 2003년에 열었는데 이젠 명실상부하게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 사랑방 같은 곳이 됐습니다. 저희 직원들이 새 음반 소개하는 이메일을 2만 명에게 보내요.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다 풍월당에 한번은 들르셨을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왜 이름이 '풍월당'입니까?

"우리 조상들이 달 뜨고 바람 불면 노래를 부르고 시를 썼다고 하잖아요. 그 낭만 정신이 유럽에선 고전음악입니다.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제 나름대로 해석한 게 '풍월'입니다."

―오페라로 유명해졌지만 그건 일부라고 하셨는데, 그럼 나머지는 뭡니까.

"저는 여행, 예술, 자유를 중심으로 삽니다. 지금은 이탈리아, 그리스, 아르헨티나 여행기를 쓰고 있습니다. 함께 나누는 게 중요해요. 예전에 저 혼자 오페라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가 이탈리아의 베로나에 가서 오페라를 봤거든요. 객석에 2만 명이 앉아있는데 같이 즐긴다는 게 그렇게 좋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그 후엔 '나눔'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지요."

오페라 전도사와 하루 종일 오페라 이야기를 했더니 슬슬 그 열정이 전염돼 오페라에 제대로 빠져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국립오페라단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공연이 다음 달 초에 시작된다. 예습도 했으니 이번에 한번 가볼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생각이 며칠이나 갈지는 모르겠다.

→ 박종호는?

정신과 의사, 오페라 평론가, 칼럼니스트, 클래식 음반 전문점 풍월당 대표다. 신문과 잡지에 오페라에 관한 글을 15년 이상 써왔고, 오페라에 관한 강의는 10년쯤 해왔다.

우리나라 오페라 대중화에 워낙 크게 기여해서 '박종호' 하면 오페라가 떠오르지만, 클래식 음악, 미술, 문학, 역사, 여행에 대해서도 오페라만큼이나 할 말이 많다. 매일 아침 한 시간 동안 달리기를 하면서 새로 나온 CD를 듣고,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다니며 틈날 때마다 글을 써서 책을 낸다.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2권에선 작곡가와 연주자, 지휘자의 삶이 어우러진 클래식 음악 이야기를 담았고, '불멸의 오페라' 1,2권은 그가 공부하고 실제로 본 오페라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오페라 백과사전이다.

'박종호에게 오페라를 묻다'는 오페라에 관한 기초적인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이다. '유럽 음악축제 순례기'에선 유럽 곳곳에서 열리는 음악 페스티벌을 소개했다. 1960년생. 부산대 의대를 졸업했다. 현재 청담 박종호정신과 원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