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MBC)이 수도권 시청률 30%를 돌파했다. 미실 역의 고현정을 비롯한 배우들의 열연으로 인기 고공행진 중이다. (조선닷컴 6월 16일 보도)
신라 왕 3대(代)와 잇따라 육체관계를 갖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미실(美室)은 대체 누구인가? 미실의 이름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1)에도 언급이 없다. 미실이 등장한 것은 1989년 이후다.
1989년 2월, '화랑세기(花郞世紀)'라는 제목의 32쪽 한문 필사본이 부산의 한 가정집에서 발견됐다. 1995년에는 162쪽 분량의 또 다른 필사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랑세기'는 서기 7~8세기에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이 썼다는 화랑들의 전기로서 오래전에 사라진 책의 제목이다.
1300년 만에 다시 등장한 이 책이 진본이라면 고려시대 이전에 쓰인 유일한 역사서이자 한국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혁명적인 원사료가 된다. 더 놀라운 것은 책 내용이었다. 근친혼·동성애·다부제(多夫制) 같은 자유분방한 성(性) 풍속도가 신라사회의 모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랑 풍월주(風月主) 32명의 전기인 이 책에서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미실이었다. 책에 따르면 미실은 제2대 풍월주 미진부와 법흥왕의 후궁 묘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미도(媚道·섹스기법)와 가무를 전문적으로 교육받았다. 필사본은 미실을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했고 명랑했으며 아름다워 백 가지 꽃의 신(神)을 모은 것 같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책에서 그는 섹스와 권력의 화신(化身)이었다. 5대 풍월주 사다함과 정을 통하다 6대 풍월주 세종과 결혼한 뒤 7대 풍월주 설화랑과도 사귄다. 진흥왕과 그의 아들 동륜·금륜과도 모두 관계했으며 왕 곁에서 직접 정사(政事)에 참여해 권력을 쥔다.
진흥왕이 죽자 진지왕(금륜)을 왕위에 올렸으며, 그가 자신을 멀리하자 폐위에 가담한 뒤 진평왕(동륜의 아들)을 새로 왕위에 세운다. 13세의 새 왕을 '도(導)'하라는 태후의 명을 받고는 '왕의 양기(陽氣)가 통하게 하는 교육'에 나선다. 서기 606년(진평왕 28) 무렵에 58세로 죽었다고 돼 있으니 진평왕 즉위 시에는 31세였던 셈이 된다.
저서 '세상을 바꾼 여인들'의 한 장(章)에서 미실을 다룬 역사평론가 이덕일씨는 "우리 역사에서 여러 여성에게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시킨 남성은 많아도 여러 남성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킨 여성은 미실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2002년에는 극작가 양정웅이 연출한 연극 '미실'이 나왔다. 2005년에는 작가 김별아의 장편소설 '미실'이 출간되기도 했다. 김별아는 "이 소설에서 성녀(聖女)와 창녀의 속성을 다 갖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여성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미실은 '선덕여왕' 이전에 이미 TV 사극에서 등장했다. SBS의 '연개소문'(2006~ 2007)에서는 서갑숙이 미실 역할을 맡았는데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미실이 죽는 것으로 나온 시점보다 7년 정도 뒤 상황에서 김유신의 연인인 천관녀의 후견인으로 나와 시청자들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문제는 '화랑세기' 필사본이 정작 학계에서 진본으로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한 소장 고대사학자는 "화랑세기는 1990년대에 위서(僞書)라고 결론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일본 왕실도서관 사무촉탁이었던 필사자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의 창작물이라는 지적이 발견 직후부터 계속 제기됐다.
이기동 동국대 석좌교수는 "화랑 단체의 갈등과 통합 과정을 서술한 것은 근대인의 사고방식"이라고 했다. 노태돈 서울대 교수는 "고려시대의 '삼국유사'를 많이 참조한 후대의 위작"이라고 했다.
권덕영 부산외대 교수는 ▲필사본에서만 보이는 인물 240여명 중 신라 금석문에서 독자적으로 확인되는 인물이 없고 ▲필사본에서 신라 왕을 제(帝)나 대제(大帝)라 했지만 이 역시 금석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박창화가 원래 '도홍기' '홍수동기' '어을우동기' 등 많은 성애소설 작가였다는 점도 의심을 키웠다. 2007년 박남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정보실장은 박창화가 1930년에 쓴 45쪽의 소설책을 찾아냈는데, 화랑을 소재로 한 이 소설의 용어와 내용 중 많은 부분이 필사본 '화랑세기'와 일치했다.
이종욱 서강대 교수(차기 서강대 총장)처럼 "후대의 유교적 윤리로써 신라사를 봐서는 안 된다"며 계속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짜라고 주장하고 있는 학자들도 있지만 '김대문의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정설을 뒤집지는 못하고 있다.
임동석 건국대 중문과 교수는 "20년 동안 역사학계가 자기들끼리 설왕설래하고 있는 동안 '미실'은 실존인물도 가공인물도 아닌 '반투명인간'이 돼 버렸다"며 "드라마에는 나오지만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 혼란스러운 상황의 책임은 대중 앞에 설 자신감을 잃어버린 학자들에게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