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서울 신당동 한양중학교. 방학을 맞은 학교에선 특기 적성 수업이 한창이었다. '영어 문법반'에서는 선생님의 필기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쓰느라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 들렸고, '기타 초급반'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기타를 어설프게 무릎에 올려놓고 '띵' '띵' 소리를 내고 있었다.
61년 역사의 이 학교는 하마터면 문을 닫을 뻔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학생 수가 감소하자 재단측이 문을 닫으려 했지만, 학부모들과 지역사회가 끈질기게 학교 살리기 운동을 벌인 끝에 이를 철회시킨 것이다.
한양중학교는 한양대 재단인 한양학원 소속이다. 1948년 문을 연 이래 3만명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개그맨 이홍렬, 가수 전영록, 서울지방변호사회장을 지낸 이준범 변호사, 축구선수 이관우 등이 동문이다. 34년 전통의 축구부는 각종 선수권 대회에서 이름을 날렸다.
한양중학교는 1980년대 초반까지는 한 반에 50명씩 학년별로 12반까지 있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하지만,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주변 인구가 줄어 지금은 17학급 552명으로 한창때의 3분의 1 수준이다. 이 때문에 몇 년 전부터 '학생 수가 줄어들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런 소문이 현실이 된 것이 올해 초였다. 한양학원이 지난 2월 서울 중부교육청에 폐교신청서를 낸 것이다. 재단 관계자는 "한양중학교와 한양공고가 운동장은 물론 건물 일부도 같이 쓰다 보니 서로 불편했다"며 "학생수가 갈수록 줄어드는 중학교를 없애고 공업 고교의 시설을 더 좋게 해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양대 재단에는 한양중 외에도 한양사대부중·한양사대부고 등이 있어 34명의 선생님들은 갈 곳이 있었다. 또 올해 당장 폐교가 확정돼도 내년부터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는 것이지 재학생들의 졸업은 모두 보장돼 있었다.
재단측은 지난 5월 열린 학교운영위원회에서 학교 폐지 방침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학부모들은 곧바로 '학교 살리기 운동'에 나섰다. 학부모들은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그날부터 곧바로 주변 신당동·광희동·흥인동·충무로 일대 골목을 훑으며 주민들을 상대로 반대 서명을 받았다. 신당초등학교·광희초등학교 학부모들을 만나 "한양중이 없어지면 버스 타고 3~4정거장씩 가야 하는 장충중·덕수중 등으로 진학해야 한다"며 동참을 호소했다.
어머니들의 '치맛바람' 덕에 이틀 동안 무려 5630명이 반대 서명을 했다. 어머니들은 "내 아들의 추억을 지켜주고 싶어서 거리로 나선 것"이라고 했다. 3학년 아들을 둔 김은숙(44) 학부모회장은 "아이들이 그나마 성적에 대한 부담 없이 함께 부대낄 수 있는 시기가 중학교 때"라며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없는 '모교'가 사라지면 얼마나 섭섭하겠느냐"고 말했다.
관할 중구청에서도 정동일 구청장을 비롯해 직원들이 "지역의 명문 사학을 지키겠다"며 학교 살리기에 발벗고 나섰다. 구청 직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한양학원과 중부교육청 관계자들을 찾아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서울 중심에 자리한 중구이지만, 1970~80년대 도심의 많은 학교들이 문을 닫거나 강남으로 옮기는 바람에 교육여건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에 따라 중구는 유서 깊은 지역 초·중·고교에 예산을 집중 지원해 다시 명문으로 '부활'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2009년 구청에 '명문학교 육성팀'까지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한양중학교가 문을 닫을 경우 이런 청사진에 차질이 생긴다.
정동일 중구청장은 "구 예산으로 학교 시설을 확 업그레이드해주겠다"며 "당장 낡은 운동장부터 새것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예상치 않았던 대대적인 학교 살리기 열풍에 중부교육청은 "학부모와 지역 사회를 설득하지 못할 경우 학교 폐교 신청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결국 한양학원은 지난 6월 23일 폐교 문제를 재검토하기로 한 데 이어 지난 10일 폐지신청을 철회했다.
누구보다 환호한 이들은 학생과 교사들이었다. 학교를 운영하는 재단의 결정이어서 대놓고 반대하기 힘든 처지라 이들의 맘고생은 특히 심했다. 전교 학생회장 3학년 최현준(15)군은 "없어질 뻔한 모교였으니 더 애착이 간다"며 "장래 꿈이 작곡가인데 더없이 훌륭한 교가를 만들어 모교에 바치겠다"고 말했다. 한양중-한양공고-한양대를 졸업해 스스로 '한양맨'을 자처하는 생활지도부장 이해종(54) 교사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후배'들을 제자로 맞아 가르치게 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며 활짝 웃었다.
딱 40년 전 까까머리 중학 3년생이던 가수 전영록씨도 "한양중 만세!"를 외쳤다. "담 너머 서울운동장 수영장에서 교실까지 나던 '풍덩 풍덩'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해요. 친구들과 장난치며 서울운동장과 동대문스케이트장을 지나던 등하굣길 풍경도 또렷합니다. 풍경이야 좀 달라졌을 테지만 그런 추억들을 후배들이 계속 이어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