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정호승 시인(59)의 시 〈풍경을 달다〉는 가수 안치환이 부른 노래로 요즘 구전(口傳)되고 있다. 안치환의 노래는 정호승 시인의 낭독회에서 수많은 청중을 감동시키곤 한다.
맑은 슬픔과 고운 기쁨을 노래해 온 정호승의 시는 지금까지 40여편이 대중가요로 만들어졌다. 시인은 그 가요들을 '시(詩)노래'라고 부른다. 그는 "시 낭독회에서 노래 '풍경을 달다'를 듣고서 우는 청중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시보다 노래의 힘이 더 강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시인은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와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하는 '책, 함께 읽자' 낭독회에 가장 많이 출연한 문인이다. 지난 4개월 동안 12회나 된다. 정 시인은 선착순으로 청중 3명에게 시집을 읽게 하고 노래도 함께 듣는 등 다채롭게 낭독회를 진행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시를 어렵다고 느끼는 청중에게 낭독회 참여 자체가 삶의 놀이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 1973년 등단 이후 《슬픔이 기쁨에게》 등 9권의 시집과 동화집·산문집을 냈고, 소월시문학상·동서문학상·정지용문학상·편운문학상·가톨릭문학상·상화시인상 등을 수상했다.
문학성과 대중성의 조화를 이룬 우리 시대의 '가객(歌客)'으로 꼽히는 정 시인은 "시의 역할은 위로와 위안이고 인간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쉽고 부드러운 시는 현실과 삶의 고통을 달콤하게 포장하는 '당의정(糖衣錠)' 같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에 대해 정 시인은 "우리가 왜 음악을 듣느냐"며 "시는 '영혼의 밥'이고 누구나 지니고 있는 '상처에서 피는 꽃'"이라고 말했다.
정 시인의 작업실은 서울 대치동의 노부모님 아파트에 있다. 도곡동에 사는 시인은 전철을 타고 올해 아흔 살인 부모님 집으로 출근한다. 책꽂이에는 시집 이 외에는 가톨릭과 불교 서적이 주류를 이룬다. 책상에는 시작(詩作) 메모가 담긴 노트가 놓여 있다. 그는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메모를 해뒀다가 그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안에 시를 써내려 간다.
시인이 2003년에 만든 노트를 펼쳤다. '남산 야외 식물원에 있는 시각 장애인 식물원에 가면 시각 장애인이 눈을 뜨기도 전에 식물(꽃이름 찾아서 쓸 것)이 먼저 눈이 되어 꽃을 보여준다'라는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이 초고는 시 〈시각장애인식물원〉을 낳았다. '시각장애인식물원에는/ 꽃들이 모두 인간의 눈동자다/ 나뭇잎마다 인간의 푸른 눈동자가 달려있다/ 시각장애인들이 흰 지팡이를 짚고/ 더듬더듬 식물원으로 들어서면/ 나무들이 저마다 작은 미소를 지으며/ 시각장애인들의 손바닥에 하나씩/ 눈동자를 나눠준다'
정 시인은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 "시를 몰아서 쓰는 데 필요한 마음의 평화와 몸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피트니스 센터에 가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인터넷 다운로드 때문에 음반뿐 아니라 시집도 예전처럼 팔리지 않는다"면서 "인터넷에 올려진 내 시들 중에는 오타(誤打)는 물론이고 제목까지 틀린 것도 상당수"라며 피식 웃었다. 인터넷에서는 정호승의 시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가 떠돌아다닌다. 하지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그의 시 〈그리운 부석사〉의 첫 행이지 시 제목이 아니다.
정호승 시인은 "시를 쓴 뒤 한 달 뒤 다시 읽으면 쳐낼 것이 많이 보인다"면서 "입에서 거치적거리는 것을 빼고 나면 시란 침묵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