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어떤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때 "성(姓)을 갈겠다"고 한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은 그만큼 신성하고 소중한 것이어서 그걸 바꾸는 것 이상의 치욕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70년 전 오늘인 1939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우리 고유의 성명(姓名)을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제를 공포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후 친일정권을 앞세운 단발령으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머리카락을 자르게 하더니 성까지 갈도록 강요한 것이다.

▶행정기관들과 학교, 전국 2943개 경찰 주재소가 창씨개명 압박에 나섰다. 당시 한국인의 성은 341개. 전남 곡성의 유건영이라는 사람은 "나라가 망할 때 죽지 못하고 30년 욕 당하며 그들의 패륜과 난륜, 귀로써 듣지 못하고 눈으로써 보지 못하겠더니 이제 혈족의 성까지 빼앗으려 한다. 짐승이 돼 살기보다 죽음을 택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경남 동래의 50대 남자는 성을 '이누노코(犬子·개새끼)'라고 바꿔 신고했다. 읍장이 왜 이렇게 지었느냐고 묻자 "조선인은 성을 바꾸면 개새끼, 소새끼라고 불리는데 내가 성을 바꿨으니 개새끼가 된 것 아니냐"고 했다. 총독부 앞으로 '天皇族皆殺郞(일왕 가족을 몰살시키려는 사내)' '昭和亡太郞(쇼와 일왕을 멸망시킬 남자)'으로 창씨해도 되느냐고 야유하는 엽서를 보낸 이도 있었다.

▶그래도 자녀 입학부터 가족 취직, 행정서류 접수까지 온갖 일이 걸려 있으니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金)은 가네다(金田) 가네무라(金村), 이(李)는 리노이에(李家) 식으로 흔적을 남기거나 최(崔)는 요시야마(佳山) 식으로 파자(破字)하는 방법이 등장했다. 자기 성을 최소한이나마 유지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6개월 동안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사람이 인구의 80.5%에 이르렀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저항시인 윤동주가 히라누마(平沼)로 창씨한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학생 질문을 받고 대답하기가 난감하더라고 했다. 누가 봐도 친일 거두였던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 한상룡(중추원 고문) 박춘금(대의사) 윤덕영(귀족원의원) 등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창씨를 안 했다고 반일로 볼 수 없듯, 창씨를 했다고 일제 정책에 동조한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잣대다. 일제 총칼과 군홧발에 억눌려 민족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를 통과해야 했던 개개의 삶을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일본의 빗나간 추억… '피폭'은 면죄부인가?
모욕 당한 일본인 복수의 칼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