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電氣)가 밤을 환히 밝힌 건 초등학교 2학년 때다. 버스는 6학년 때 운행됐지만 길 얼어붙는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진 구경할 수 없었다. 소년이 태어난 고향 전북 임실군 운암면 광석리는 읍내에서 10㎞ 떨어진 산골이었다.

빈농의 자식에겐 대학이란 꿈이 어림없던 시절이었다. 그 역시 고교 졸업 후 전주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 두 달 남짓 지난 뒤였다. 그가 학교 담장을 넘었다. 이대로는 가난의 굴레를 못 벗어날 것 같다는 압박감이 그를 밀어올렸다.

출셋길은 권투(拳鬪)나 고시(考試)밖에 없었다. 그는 경기도 양주의 섬유공장에서 일하며 그해 11월 신인왕전을 준비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검정고시 준비하는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돕다 갑자기 '띵'하고 충격이 왔다.

"나도 더 때를 놓치면…." 잘됐으면 프로 복싱 한국챔피언쯤 지내고 끝났을 김명기(金明基·43)의 팔자(八字)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는 '아발론 교육 대표이사'다. 아발론은 청담·정상어학원과 함께 국내 영어학원 시장의 빅3이다.

가난하고 한치 앞이 컴컴한 이는 번번이 극단적인 선택 앞에 놓여야 했다. 권투와 고시, 공장과 대학. 원하는 걸 하려면 이 악무는 수밖에 없다. 서당에서 한문 가르치던 남자가 국내에서 손꼽히는 영어학원 원장이 된 사연도 결국은 단순하다. 살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직영과 프랜차이즈 합쳐 전국 100개의 '아발론'에 4만8000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1년 매출이 1000억원에, 순익 130억원을 내는 이 알짜 기업에 2008년 AIG가 6000만달러를 투자했다. 국내 교육업계 가운데 가장 큰 외자 유치다.

아발론(Avalon)은 아더왕(王)이 잠든 곳이다. 캄란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은 왕은 거기 머물며 위기가 닥칠 때를 기다린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그는 눈을 뜨고 세상에 나올 것이다. '브리타니아 열왕기(列王記)'에 나오는 얘기다.

김명기의 '아발론'에는 사연이 있다. "대학 때 영어에 빠져 홀연히 영국으로 유학 간 후배에게 아발론 이야길 들었습니다. 전 그곳을 동양의 무릉도원(武陵桃源)처럼 봤어요. 영웅이 들어가고 배출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두 번 살다

글러브를 벗은 김명기는 그해 대입 학력고사 준비에 돌입했다. 70일이 남아 있었다. 그는 걸으면서 공부했다. 가로등이 밝아지면 책을 읽었다. 어두컴컴한 길을 지날 때는 읽은 걸 외웠다. 그런 생활이 시험 전날까지 계속됐다.

그는 원광대 한문교육과에 합격했다. 차석(次席)이었다. 서울의 대학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장학금이 필요해 선택한 길이었다. 자기와 대학은 평생 운(運)이 닿지 않을 것 같다고 믿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드디어 대학생이 됐다.

―70일 공부해 대학에 붙을 정도면 기본 실력은 있었나 봅니다.

"임실고에서 전교 4등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해엔 성적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요. 중학은 임실동중을 나왔습니다. 그 학교 출신 중에 재계 거물이 많았어요. 명성 김철호 회장, 미래산업 정문술 전 사장 같은 분들이 선배입니다."

―직업훈련원에선 뭘 공부했습니까.

"전기기사가 되려 했지요. 들어가 보니 저와 맞지 않더군요. 그래도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700명 모집하는 시험에서 1등을 했는데, 1등이 안 다니면 훈련원에서도 곤란해지잖아요."

―권투 생각은 왜 한 겁니까.

"1986년인가 TV에서 무가비라는 프로 복서의 경기를 본 적이 있어요. 대전료가 70억원이었을 겁니다. 놀랐어요. 한 번 대전(對戰)에 그렇게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니. 그 시절 배고픈 젊은이들은 복싱을 많이 했습니다."

―운동에 소질이 있나요.

"운동은 못하는 게 없어요. 100m를 12초플랫에 뛰고 윗몸일으키기는 1분에 67개를 했어요. 제자리멀리뛰기를 2m83이나 했고 팔굽혀펴기도 수백개는 거뜬했고요. 고교 체육대회 때는 5개 부문에 출전했어요."

―신인왕전 준비는 어떻게 합니까.

"평소 체중이 67㎏인데 전 페더급을 노렸습니다. 그러려면 10㎏을 빼야 해요. 섬유공장에서 13시간을 일하며 일부러 남의 일까지 맡아 했어요. 체중 줄이려고요. 아침에는 의정부에 있는 체육관에 다녔고요. 하루 4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았어요."

―남들 몫까지 일해주면 월급을 많이 받았겠네요.

"기숙사에서 먹고 자고 월 16만원을 받았습니다. 대입 학력고사 끝나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부산의 신발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프레스 일을 했는데 두 달 동안 80만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차이가 심한가'하는 생각을 그때 했습니다. 사실 제가 일을 잘해요."

―무슨 일을 잘한다는 겁니까.

"대학 1학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왔어요. 복학 앞두고 전주에서 '노가다'를 했습니다. '곰방'이라고 벽돌 나르는 일인데 다른 사람들이 일당 8000원 받을 때 전 3만원을 받았어요. 한 달에 27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지요. 그만둘 때 십장이 '복학하지 말고 같이 일하자'고 권유하더군요."

―시골생활 할 때 몸에 밴 거군요.

"어릴 때부터 지게 지고 다녔습니다. 안 해본 게 없을 정도였어요. 대학 다닐 때도 금요일 막차 타고 고향 가면 아버지가 성인 2명분의 일을 맡겨요. 전 그걸 토요일 새벽부터 밤까지 다 해냈어요. 하고 싶은 건 공부인데 그러려면 일을 빨리 끝내야 공부할 시간이 생기잖아요."

―권투를 그만두려 할 때 관장이 말리진 않던가요.

"어렸을 때는 얼굴이 지금보다 더 깨끗했어요. 관장님과 사모님이 걱정을 하긴 했어요. 그 잘생긴 얼굴로 왜 권투를 하려 하느냐고."

―출세하려면 권투나 고시밖에 없다면서 왜 한문교육과를 택했습니까.

"고교 때 한문선생님 영향이 컸습니다. 진짜 한문 전공자였는데 너무 재미있게 가르쳤어요. 한문교육과를 택한 건 저도 무지(無知)했고 주변 조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이란 책 아시죠? 고시 합격자들 수기(手記)인데 전 고교 다닐 때 그 책을 몇번이나 탐독했어요. 당연히 법대에 진학했어야 했는데 '취미로 한문 배우고 고시공부 해도 되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겁니다."

―대학에 들어가니 집에서 좋아하던가요.

"상일꾼이 무슨 대학이냐는 소리만 들었지요. 제가 운명이 약간 기구해요. 7세 때 경기(驚氣)가 들었는데 심장과 호흡이 멈췄어요. 양의(洋醫) 한의(韓醫)가 모두 사망진단을 내렸대요. 초상집이 차려지고 동네 아주머니 아저씨들 모여서 소주 마시고 했대요. 발인하는 날 새벽 5시에 깨어난 거예요. 그때부터 전 '두 번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말년운

가난은 비교할 대상이 없으면 느끼지 못한다.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죽도록 일하면서도 김명기는 그걸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은 달랐다. 승용차를 끌고 다니는 학생이 있었고 김명기는 서클 활동비조차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가난은 때론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들고 때론 비관하게 만들며 때론 공부에 몰입하게 만든다. 김명기가 그랬다. 그는 교수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공부에 빠져들었다. 그 첫걸음이 논어·맹자·대학·중용의 '사서(四書) 암기'였다.

―대학생활은 즐거웠나요.

"윤미길 교수님이라고 정말 인격의 완성체 같은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절 제자로 삼은 게 아니고 제가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려 했지요. 지금도 찾아봬요. 전에는 '바쁜데 뭐하러 오느냐'고 하시더니 요즘은 '꽃 피면 찾아뵙겠다'고 하면 '꽃 피기만 기다리겠다'고 하세요. 만날 때마다 손수 시(詩)를 적어와 만경강 하구둑을 거닐며 저희들에게 들려주시지요."

―사서는 어떻게 외웁니까.

"왕도(王道)는 없어요. 처음부터 외우다 막히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외우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면 끝까지 외우게 되지요. 방학 때면 정읍의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는 남원이나 정읍에 옛날식 서당이 있었어요. 댕기머리 땋은 학생들도 있었고요. 혼원당(混源堂) 선생님께 배웠는데 그분이 새벽 5시쯤 문밖에서 기침을 하면 밖으로 나가 읍하고 전날 배운 걸 암송해야 합니다. 정확히 다 외워야 다음 진도를 나가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날 수업은 없지요."

―사서 중에 뭐가 으뜸인가요.

"논어(論語)지요. 성인들의 이야기를 묶은 걸 경전(經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논어에는 모순점이 없어요. 그러니 공자를 성인(聖人)이라 하는 거지요. 맹자에는 조금 모순이 있어요."

―공부에 빠져도 가난하다는 억울함이 가시지는 않겠지요.

"혼원당 선생님을 대학에서 처음 만났어요. 그분이 사주명리학도 하셨는데 사주를 물으니 대답하지 않더군요. 한 달 뒤 다시 물었을 때도요. 다시 한 달 뒤 같은 질문을 하니 그제야 '그게 그렇게 궁금하느냐'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넨 부모·형제의 도움을 하나도 못 받고 자수성가할 것'이라고 했어요. 굉장히 허탈했어요."

―왜요.

"사람이 삶이 풍요롭지 못하면 위로받고 싶잖아요. 전 '잘 될 것'이라는 말을 기대했었는데."

―자수성가도 언제 하느냐가 중요하지요.

"그분이 그 뒤 몇 달 동안 제 행동거지를 지켜보더니 이러시더군요. '자넨 42살 때부터 대운(大運)이 20년간 계속 될 것'이라고요. 제가 그때 24살이었는데."

―18년을 어떻게 기다리나요.

"그게 또 이상해요. 말년운이 좋다니 시련이 와도 나중에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전 그 후 저와 직원의 이익이 상충되면 직원쪽으로 좋은 결정을 내립니다. 저와 회사의 이익이 상충되면 회사쪽으로 결정을 내리게 되고요."

―그런데 한문을 하던 분이 어떻게 영어와?

"제가 사서를 다 암기했을 때였어요. 혼원당 선생께서 뜬금없이 '자네 한문을 계속할 거냐'고 묻는 겁니다. 하도 이상해 '제가 소질이 없습니까'라고 여쭈니 '자넨 영어로 성공할 거니 영어를 하라'는 거예요. 얼마나 화가 나던지 3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 다시 여쭤봐도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그 말에 영어공부를 시작했다는 건가요.

"대학 3학년 때 '태동고전연구회'라고 청명 임창순 선생께서 맡고 있는 한림대 부설연구원이 있었어요. 그곳에 전국에서 10명을 선발해 장학금을 주며 석사과정을 밟게 하는 제도가 있습니다. 시험 삼아 응시해보려 원서를 작성하는데 토플 점수를 기재하는 난이 있더군요. 깜짝 놀랐어요. 전 토플이 뭔지 몰랐거든요."

―그래서요.

"하루 12시간씩 영어와 씨름했지요. 사서 외울 때처럼요. 1년 만에 토플에서 600점을 받았어요. 제가 한문교육과를 수석졸업했지만 한문으로는 갈 길이 많지 않았어요. 당시 순위고사를 봐서 교사가 되거나 추천받아 순위고사 보지 않고 사립고교에 가는 길이 있었어요. 대우그룹이 당시 원광대와 자매결연을 맺어 한 해 200명씩 무시험 선발했어요. 그런데 한문교육과 출신에겐 그 길도 좁았어요. 영어를 하고 나니 길이 넓어지더군요."

―영어에 빠지면서 한문으로 향하던 길이 달라졌군요.

"영어공부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게 됐어요. 처음엔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 진학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가난했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회사에 입사하려니 교수님들이 펄펄 뛰셨지요. '자네 같은 사람이 왜 기업에 들어가려 하느냐'고요."

■세명의 수강생

김명기는 대기업을 피했다. 자기 존재감조차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건 서울 서초동 '아빅스테크'라는 방송음향장비 관련업체였다. 그때 그가 마음속으로 상정한 라이벌이 샐러리맨 신화를 만든 이명박(李明博)이었다.

'사원 MB'처럼 되겠다고 마음먹은 김명기는 회사가 시키지 않은 일도 했다. 관세(關稅) 줄이는 법을 찾아냈고 남들이 공항에서 한 번 수입물품을 찾아올 때 5일분 일을 한꺼번에 해치웠다. 부지런 떠는 그를 동료들이 곱게 볼 리 없었다.

―공항에서 어떻게 5일분 일을 한 번에 하나요.

"공항에서 물건 찾는 게 생각보다 힘듭니다. 신용장 접수한 뒤 면장(免狀) 나오면 세금 내고 창고로 가야 하는데 그걸 한꺼번에 한 거지요. 대한항공, 아시아나 창고가 떨어져 있는데 용달차 기사에게 요령 있게 시키면 할 수는 있어요. 물론 온몸이 한겨울에도 흠뻑 땀에 젖을 정도로 뛰어다녀야 하지만요."

―밤늦게 일이 끝나겠네요.

"밤 10시 넘어 일을 다 처리하고 회사로 돌아오면 직원들이 불만이 대단할 수밖에 없지요. 남들은 하루에 하나만 하면 되는데 저 때문에 남아서 기다려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창고료, 운송료뿐 아니라 교통비까지 절감할 수 있게 되지요."

―회사에서 평가를 해주던가요.

"입사 첫해 최우수 사원으로 선정됐고 대리 승진도 제일 빨랐어요."

―그런 회사를 왜 나왔나요.

"무역부에서 근무하다 영업부로 옮겼을 때였어요. MBC에 '오디오 믹서'라는 3억7000만원짜리 기계를 납품하고 돌아올 때였습니다. 같이 갔던 엔지니어들이 인수가 끝났는데도 그 기계에서 눈을 못 떼더군요. 좋은 기계로 한 번 일해보고 싶었던 거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동기부여가 이렇게 중요한 거구나'하는. 제가 일은 열심히 했지만 적성(適性)과 꼭 들어맞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맞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열심히 일하는 사원이 나가려 하면 붙잡았을 텐데.

"회사 나오는 데 여섯달이 걸렸어요. 사표 수리하는 데 석 달, 업무 인수인계하는 데 석 달. 영어학원을 하겠다니 임원들이 전부 말렸어요. '이쪽 업무 대충 다 익혔으니 창업해도 충분히 먹고 살 텐데 웬 영어학원이냐'면서요."

―방송음향장비 업체를 다니다 영어학원 차리는 건 진짜 모험이지요.

"아발론을 성남시 분당에 차린 게 1997년 12월 1일입니다. 그때 IMF가 터졌잖아요. 최악이었지요. 돈 2000만원을 빌려 학원을 냈는데 2주 만에 다 날아갔어요. 수강생이 달랑 세명뿐이었고요."

―후회되던가요.

"다시 돈을 구하러 다녔지요. 22명에게 1억8000만원을 빌렸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돈 빌리려다 '도박하느냐'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처음에 적었지만 나중에 학생들이 많아졌는데도 돈을 빌리러 다녔으니까요. 그때 하도 사채(私債)업자들에게 곤욕을 치러 지금도 모르는 전화가 오면 받지 않습니다."

―영어도 직접 가르쳤습니까.

"전 한문을 가르쳤지요. 당시 한문반에 수강생이 제일 많았어요. 그러다 정찬경 선생이라는 분을 모셔오게 됐어요. 미국에서 9년 동안 있으면서 교육학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분이었어요. 대화해보니 아주 좋은 분이더군요. 그때 제가 수강생들의 어머니들께 편지를 보냈어요."

―무슨 편지를.

"'제가 그동안 원장으로 있으면서 한 번도 영어 강의를 권한 적이 없는데 진짜 실력 있는 분이 오셨다, 자제분을 맡겨주시면 성심성의껏 가르치겠다'고요. 그랬더니 한꺼번에 40명이 왔어요. 그 뒤 점점 커졌고요."

―처음 학원 할 때 부인은 반대하지 않던가요.

"아내는 반대하지 않았어요. 사실 제 행동 패턴이 좀 특이해요. 일만 하느라 집에 전구(電球)가 나간 것도 모르고, 전·월셋집 찾을 때 가보지도 않고, 이사하는 것도 돕지 않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갔으니까요. 전 아내와 한 번도 싸우지 않았어요. 싸우면 피곤해지고 일하는 데 지장받잖아요."

―부인과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아내(김정화)는 차병원 간호사 출신인데 동갑입니다. 제 사촌동생과 필리핀 여행 때 만나서 서로 사진 찍어주고 했는데 아내가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대요. 사촌동생이 저를 지목하자 아내는 '위인전도 안 읽어봤느냐'고 핀잔을 줬답니다. 그런데 사촌동생이 정색을 하고 제 이야길 한 거예요. 나중에 그 말을 전해듣고 사진을 보니 미인이더군요. 전 비키니 테스트까지 다 하고 아내를 사귀게 됐어요. 9개월 만에 결혼했습니다."

■변화와 도약

어릴 적 김명기는 가난을 몰랐다. 대학에 들어가고 세상을 알면서 내면에서 가난과 풍요, 행불행의 밀도가 달라졌다. 그는‘형평’이 무너지는 걸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많다 는 걸 안다. 우리 사회에서‘영어 학원’또한 그 심리 한가운데에 놓인 존재일 것이다.

그는 '예고된 변화'를 도약의 기회라고 믿는다. 2000년 토플시험이 PBT에서 CBT로 바뀔 때 그는 토플 1개반에 강사 4명을 투입했다. 문법·독해·청취·영작을 가르치겠다는 뜻이었다. 비용이 크게 증가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2002년 수도권 고교 평준화가 됐을 때도 그는 특목고(特目高) 바람을 예상했다. 그때 그는 초등학생부터 성인에게 영어, 일어, 중국어를 가르치던 학원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3까지만 다니는 영어 전문학원으로 특화했다.

―변화가 있을 때마다 적중한 겁니까.

"2006년 CBT가 바뀔 때도 그랬어요. 강의실 5곳에 강사 12명을 투입했지요. 스피킹을 밀착지도 하려고요. 2012년 전자 교과서가 도입되면 다시 변화가 있을 겁니다. 저흰 이미 그 체제에 대비하고 있어요."

―학원 운영에 재주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남들을 잘 가르칠 수 있다는 능력이 있는 것을 알게 된 건 서당에 다닐 때였어요. 혼원당 선생께서 정읍시내에서 한문학원을 경영하셨어요. 어느날 몸이 편찮으셔서 제가 가르쳤는데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 뒤 석달 만에 학생 수가 22명에서 77명으로 늘었어요. 그분은 선비여서 학채(강의료)도 제대로 못 받았어요. 전 수강료 봉투를 만든 뒤 학생들 편에 부모님들께 보냈어요. 대학 때 영어공부할 때도 제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1년에 방학특강이 4번 있는데 연간 수강권 비슷한 걸 조금 저렴하게 내놓자고 강사께 제안한 거지요. 그분이 제 덕에 전세 살다 47평 아파트를 샀습니다, 하하."

―아발론의 직원들이 전부 정규직(正規職)이라고 들었습니다.

"900명 전부 정규직입니다. 강사부터 청소 아주머니들까지. 청소 아주머니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하면 용역맡기거나 파트타임을 고용하는 것보다 비용이 1.2배에서 1.5배 더 드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성심성의껏 하지요. 책상을 닦아도 진심으로 닦게 되고. 그럼 학생들이 더 쾌적하게 공부할 수 있게 되잖아요."

―경영효율로는 정석(定石)이 아닌 것 같은데.

"직원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게 된 건 TV에서 한 은행원의 이야길 들은 게 계기가 됐어요. 그가 다니던 은행이 합병됐는데 이런 말을 하더군요. '지금까지 난 은행이 내 능력을 보상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막상 은행이 망하고나니 지방상고에 야간대학 나온 내가 동생 대학 보내고 차 사고 집 사고 부모님 모시고 산 게 다 은행 덕인 줄 알게 됐다. 충분히 보상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고요. 전 직원들에게 회사가 그걸 해줘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주 5일제도 적용하죠.

"저흰 월·수·금, 화·목 체제로 수업합니다. 토요일, 일요일은 학원을 안 해요. 초등학생은 밤 8시 50분, 중학생은 밤 10시에 꼭 수업을 끝내고요. 공부하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아이들 학원 때문에 가족여행 한 번 못 가서야 되겠습니까. 직원들 역시 자기들의 생활이 있고요. 출산휴가·육아휴가도 꼭 보장해줍니다. 지금 한 40명 정도가 출산휴가나 육아휴가 중일 거예요."

―일부 학부모들이 '공부를 덜 시킨다'고 항의하지 않을까요.

"대신 숙제를 많이 내주지요. 성실히 하면 1시간 반 정도에 할 수 있을 만큼. 그럼 1주일 내내 공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사교육비 때문에 못 살겠다는 학부모들이 많습니다.

"저희도 지금까지는 수업을 2시간반씩 했는데 올 초부터 80분, 110분으로 바꿨어요. 그럼 수강료가 낮아지지요. 처음엔 망설였는데 '좋은 백화점 갔는데 명품 백이 하나밖에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되겠느냐'는 직원들 의견에 따른겁니다."

―왜 고교생은 가르치지 않나요.

"저희 목표가 중3 때까지 영어를 완성하는 것이니까요. 저희 학원 중3의 하위 레벨이 수능 80점 만점을 기준으로 75점쯤 받습니다만 앞으로는 고교생도 가르칠 계획입니다. 수능 외에도 더 수준 높은 교육이 필요하니까요."

―얼마 전 강남 학생과 지방 학생의 영어 점수를 비교한 기사가 파장이 컸는데….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자(富者)들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 양질(良質)의 수업을 받기 힘든 아이들을 가르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그게 힘들 거예요. '형평'이 무너지는 걸 서로 못 견뎌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