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고넨(epigonen)의 시대'라는 말이 있다. 사상사에 길이 남을 걸출한 거인이 사라지면 그 후에 그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인물들이 나오는 것을 말한다. '아류(亞流)의 시대'라는 뜻이다. 헤겔 이후 헤겔학파가 에피고넨이고, 마르크스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에피고넨이며, 동양에서도 공자 이후 맹자부터가 에피고넨이다.
논란은 있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는 거인이다. 시대를 만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아마 박정희의 아류쯤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김영삼·김대중이라는 거인들이 대통령을 지냈고, 김영삼과 김대중을 섞어놓은 아류라 할 수 있는 노무현에 이어 박정희의 아류가 될까 말까 한 이명박 대통령이 현직에 있다.
거인이 떠나면 사람들은 그 뒤의 에피고넨들에 만족하지 못한다. 거인의 잔상이 짙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에피고넨들은 고만고만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은 여야 할 것 없이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비슷한 아쉬움을 느낀 바 있다. 물론 당시 노사모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지금 여야 후보들의 논란도 대부분 이같은 아류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야당은 어떻게든 박근혜를 박정희와 연결시키려 하고, 야당 내부에서는 문재인과 김두관이 '노무현과 얼마나 같고 다른지'를 두고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손학규는 운동권 배신과 한나라당 배신이라는 치명상을 씻어내느라 발버둥치고 있다. 손학규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에피고넨 정도가 될까? 사실 이런 논란들은 국민들의 민생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대선이 불과 5개월여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사람들이 과거처럼 사석에서 격론은 벌이지 않고 그저 '이번에는 누가 될까' 정도 이야기하다가 마는 것도 민생과는 무관한 논쟁이나 하고 있는 후보들의 그저 그런 수준 때문인지 모른다.
이번 12월 대선에서 투표를 하게 될 국민에게 중요한 것은 박근혜 자체, 문재인 자체, 손학규 자체, 김두관 자체일 뿐이다. 그러면 이들은 과연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 국민들의 삶은 누구를 통해 나아질 수 있을까?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내외 안정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번영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우파는 좌파가 싫어서 박근혜에게 기대보려 하고, 야권 성향의 사람들은 대통령 및 집권세력이 싫어서 야권 후보들을 둘러보긴 하는데 선뜻 이 사람이다 싶은 후보가 없는 상황이 2012년 7월 대한민국 정치의 지형도라 한다면 지나칠까?
사실 지금은 박근혜의 단점으로 소통부족·독선 등을 말하지만 그전에는 오랫동안 '콘텐츠 부족'이 꼽혔다. 좌파진영에서도 문재인과 김두관에 대해 '사람은 좋은데 콘텐츠가?'라는 말이 나온다. 특히 두 사람은 나름대로 자신의 콘텐츠를 선보이기 위해 책을 냈는데 오히려 그 책을 읽어본 사람들이 '실망했다'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이걸 들고 대통령 하겠다고 나왔느냐는 의문이다. 손학규의 경우는 스스로 콘텐츠에 대해서 자신감을 피력하지만 당을 옮겨 다닌 사람의 콘텐츠가 아무리 좋다 한들 그 바탕의 신뢰가 없기 때문에 야권성향의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아직 출마 여부조차 못 밝히는 안철수를 포함해 이제 12월 대선에 나설 인물들의 면면은 대체로 다 드러났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주요 후보들의 면면과 속살이 이 정도라면 에피고넨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과찬이다. 에피고넨 노무현은 적어도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에 대한 실패한 꿈이라도 키워주었고, 또 한명의 에피고넨 이명박은 경제는 살리겠지라는 허망한 꿈이라도 던져주었다. 우리는 점점 에피고넨의 시대조차 지나서 난쟁이들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