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한 음료회사가 '날은 더워 죽겠는데 남친은 차가 없네'란 옥외광고를 버스 정류장에 붙였다가 거센 항의에 광고를 내리고 사과문까지 발표한 일이 있다. 광고의 '차'는 '자동차'가 아니라 '보리차'를 뜻한다고 해명했으나, 욕만 더 먹었다.
우리 시대 '된장녀'들에게 차 없는 남자는 돈 없는 남자, 키 작은 남자와 함께 3대 루저(loser·패배자)로 취급된다고 한다. 이런 물정을 몰랐는지 카피라이터와 광고주는 그 문구를 우리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애교 있는 도발' 정도로 판단한 듯하다. 그러니 다른 곳도 아닌 버스 정류장 7곳에 내걸었을 것이다.
일본 신문에 얼마 전 이런 기사가 나왔다. "거품경제가 끝난 뒤 학창시절을 보낸 세대는 낭비를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절약 생활을 '멋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내용이다. 지금 20대, 30대를 가리킨다. 가까운 곳은 자전거, 먼 곳은 철도나 버스로 이동하는 젊은이들의 생활 습관도 전했다.
일본 젊은이의 '자동차 이탈(차를 사지 않는 것)'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007년 도쿄의 20대 젊은이 1207명을 조사하니, 자동차 보유비율은 13%였다. 2000년 23.6%에서 10%포인트 이상 떨어졌다. 자동차를 사지 않는 풍조를 넘어, 자동차 없는 현실을 멋지게 받아들이는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풍조는 일종의 자기 최면이다. 일본 젊은이들의 자동차 이탈엔 장기 침체와 청년 실업이라는 경제적 배경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못 사는' 것을 마치 '안 사는' 것인 양 귀엽게 포장한 것이다.
이런 풍조와 관련해 '심플(simple)족'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평론가 미우라 아쓰시의 2009년 책 '심플족의 반란: 물건을 사지 않는 소비자의 등장'에서 나온 말이다. 복잡하고 과한 소비를 멀리하는 생활을 뜻한다. 심플족이 유행을 타니 돈 있는 젊은이까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현상은 경제 성장에 부정적이다. 하지만 일본 젊은이들이 시대 변화에 자족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빚더미에 올라 경제에 더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을 것이다. 일본은 부채 대국으로 유명하지만, 가계 부채는 GDP 대비 67% 수준으로 한국(81%)보다 낮다. 정부가 부채대국을 만들었어도 일본이 유럽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은 절제하는 가계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한국 경제는 앞으로 저성장을 벗어날 수 없다. 많은 사람이 최후의 '한탕'을 기대하고 있지만, 아파트와 주식 갈아타기 수법으로 부자가 되는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서 배울 것이 아직 남아있다면, 그런 시대에 순응해 삶의 습관과 철학까지 변화를 모색하는 개인의 모습일지 모른다.
일본에서 '청빈(淸貧)의 사상'이란 책이 서점가를 휩쓴 것은 1993년, 일본 경제가 정체 국면에 들어선 직후였다. 한국 경제의 오늘은 당시 일본과 닮았다. 무리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일본은 정부가 무리했다. 한국 정부 역시 누가 정권을 잡든 무리할 태세다. 그러면 국민이라도 미래를 방어해야 하지 않을까. 있는 사람은 소비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무리까지 조장해선 안 된다.
자기 최면이라도 좋다. '더워 죽겠는 날'에도 차 없는 남친이 사랑스러운 여친, 동대문 패션으로 온몸을 도배해도 여친이 사랑스러운 남친, 한강공원에 텐트를 치고도 하와이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명랑가족…. 자족하는 사람들이 유행을 주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좋은 미래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