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전만 해도 엉망이었어. 요새 많이 깨끗해진 거야. 노숙자들이 술만 취하면 식당 앞에서 토하거나 바지를 훌렁 벗고 똥 싸고 신문지로 덮어둬. 그러면 술병 들고 비틀거리던 다른 노숙자가 그걸 밟아 미끄러지고…."
서울역 광장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70대 여성은 술 취한 노숙자들 때문에 속 터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술 냄새를 풍기며 식당에 들어와 "술 내놓아라"고 소리를 치거나, 식당 앞 풀숲을 '노숙자 화장실'처럼 이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0일 오후 8시쯤 이 식당 앞은 토사물 흔적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밤낮없이 이어지는 술 취한 노숙자들의 구걸과 행패, 아무 곳에나 쓰러져 잠든 사람들, 서울역 광장 곳곳에서 풍기는 술 냄새와 지린내…. 대한민국 교통 중심인 서울역을 오갈 때마다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마저 인상을 찌푸리게 하던 풍경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서울역에서 이같이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서울역 노숙자들 사이에서는 '거물'로 통하던 주폭(酒暴) 노숙자 5명이 지난 5월부터 줄줄이 구속되면서부터다. 지난달 1일은 노숙자들 사이에서 '초대형 사건'이 터진 날이었다. 막노동을 나가 돈 몇만 원을 손에 쥐면 노숙자들에게 술과 안주 '한턱'을 푸짐하게 내 '대장'으로 통했던 주폭 강모(43)씨가 술김에 경찰의 뺨을 때렸다가 붙잡혀 갔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서울역에서 지내며 터줏대감 역할을 하던 노숙자 정모(39)씨도 술에 취해 지나던 여성의 치마 속을 보다가 경찰에 구속돼 서울역에서 사라졌다. 이처럼 대장 격 노숙자들이 경찰에 하나 둘 잡히자 술을 즐기던 노숙자 사이에서 "조심하자"는 말이 순식간에 돌았다.
10일 오후 3시쯤 서울역파출소 경찰과 서울역 코레일 역무원 등으로 이뤄진 '서울역 협력순찰대'가 순찰을 시작하자, 서울역 광장 일대 노숙자들은 '비상'이 걸렸다. 순찰대가 서울역 광장 시계탑 부근에 도착하자 '오징어땅콩' 과자 한 봉지를 안주 삼아 소주 1병을 돌리던 노숙자 4명 중 한 명이 술병을 잽싸게 등 뒤로 숨겼다. "우리는 그냥 앉아만 있었다니까요. 잡아가지 마요." 노숙자들은 순찰대 눈치를 연방 살폈다.
서울역에서 주폭 노숙자가 줄자, 자연스레 서울역 광장 곳곳에서 풍기던 지린내가 사라지고, 역사 내 화장실도 깨끗해졌다. 서울역 청소미화원 박공자(62)씨는 "술 취한 노숙자들이 재떨이에서 꽁초를 줍느라 모래와 담뱃재가 범벅된 시꺼먼 손을 세면대에 씻어 화장실을 엉망으로 만들곤 했다"며 "그런데 요새는 이런 노숙자들이 신기하게 사라졌다"고 했다.
요주의 노숙자가 사라지자 10일 오후 9시부터 12시간 동안 취재팀이 머문 서울역파출소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서울역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화장실을 이용하겠다"며 한 시간에 1~2명씩 찾아오고, 버스 노선을 묻는 일반 시민들의 발길만 간간이 이어졌다. 노숙자 때문에 생긴 긴급 출동 건수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서울역파출소 한규식 경위는 "'10만원만 달라'며 말도 안 되는 민원을 제기하는 노숙자들까지 있어 고달픈 날이 많았는데, 주폭 노숙자가 사라지니 살 것 같다"고 했다.
서울역을 이용하는 시민들도 술에 취해 행패 부리는 노숙자가 줄어든 것을 체감했다. 시민 김지혜(31)씨는 "석 달 전엔 서울역에서 술판 벌인 노숙자를 보면 눈 마주칠까 봐 종종걸음으로 도망쳤는데, 오늘(10일)은 서울역 정문 앞에 노숙자가 안 보여서 안심"이라고 했다. 남대문경찰서 서울역파출소가 서울역 이용 시민과 인근 주민·상인 등을 상대로 지난 5월과 7월 실시한 '노숙인 관련 설문조사'에서 시민의 '서울역 체감 안전도'는 5월에 평균 38점(100점 만점)에서 7월엔 68점으로 큰 폭으로 상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