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대로라면 지난 7월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열린 그 유명한 바그너축제의 주인공은 러시아 출신 성악가 예브게니 니키틴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미 2년 전 이 축제의 개막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역에 발탁됐고 리허설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공연 직전 니키틴이 어린 시절 헤비메탈 밴드에서 웃통 벗고 드럼 치는 모습이 독일 TV에 방영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의 오른쪽 가슴에서 나치의 상징 문양( ) 문신이 발견된 것이다.

▶2차대전 후 독일에서는 히틀러 망령을 떠올리게 하는 나치 문양이나 제복, 나치식 경례가 법으로 금지돼 있다. 니키틴은 "문신은 어렸을 때 한 것이지만 내 인생에서 하지 말았어야 할 큰 실수였다"고 사과했다. 공연은 옷을 입고 하기 때문에 공연 중 문신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니키틴은 곧바로 바이로이트를 떠나야 했다. 한국 성악가 사무엘 윤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주인공 역을 대신 맡아 훌륭하게 소화해 바이로이트의 새로운 스타로 떠올랐다.

▶1854년 일본 사쓰마번의 영주 시마즈는 일본 배를 외국 배들과 구분하기 위해 흰 천에 붉은 태양을 그린 깃발을 달게 하자고 도쿠가와 막부에 건의했다. 일본 국기(國旗) '히노마루'의 기원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치르면서 히노마루의 태양 주변에 붉게 햇살이 퍼져 나가는 모양을 그려넣어 군기(軍旗)로 사용했다. 떠오르는 일본의 기세를 담았다며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라 불렀다.

▶그 후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욱일승천기는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이었다. 생사람을 인체 실험 대상으로 삼은 731부대, 일본군이 죄 없는 중국인 100명을 누가 빨리 칼로 목 베나 시합했던 남경대학살의 현장에도 욱일승천기가 펄럭였다. 일본군 성 노예들의 한이 서린 곳, 우리네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징병 현장에도 욱일승천기는 나부꼈다. 일본이 패전 후 진실로 과거를 반성하고 용서를 빈다면 욱일승천기를 영원히 땅속에 묻어버리는 일부터 했어야 했다.

▶일본축구협회가 19일부터 일본에서 열리는 U-20(20세 이하) 월드컵 여자 축구대회를 앞두고 홈페이지에서 욱일승천기를 관중의 경기장 반입 금지 품목에 올렸다가 일주일 만에 삭제했다고 한다. 일본이 독도 문제, 댜오위다오 문제로 한국·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마당이기에 이 같은 번복의 배경이 궁금하다. 런던올림픽에서도 일본 체조선수들이 욱일승천기를 떠올리는 유니폼을 입고 나와 논란이 됐다. 일찌감치 나치 문양을 금지한 독일과 욱일승천기를 여태 떠받드는 일본의 격차만큼이나 두 나라 국격(國格)의 차이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