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캐나다와 그냥 똑같네요.”

5년 전 쯤 런던에서 유럽특파원으로 근무할 당시 저와 나이 차이가 많은 큰누나의 딸 내외가 캐나다에서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조카 사위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성장한 교포인데, 며칠 동안 이곳저곳 다니더니 돌아갈 무렵 이 한 마디를 하더군요. 런던을 둘러봤더니 사회가 움직이는 시스템이 두 나라가 거의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 말이 꽤 신선하게 들렸습니다. 영국이 프랑스와의 제국 건설 경쟁에서 승리해 북미(미국과 캐나다)를 손아귀에 넣었지만, 미국이 독립전쟁을 통해 떨어져 나가면서 캐나다만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남았습니다. 이후 캐나다는 1867년 자치령이 됐고, 1951년에는 정식 국명(國名)이 캐나다자치령에서 캐나다로 바뀝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해도, 자치를 획득한 것이 150년 전 일이고 본국이 대서양 건너편에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캐나다는 영국보다 미국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조카 사위 말을 듣고 무릎을 칠 뻔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영국이 건설했던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도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구나.” 물론, 대영제국 시절과는 다르겠지만 말이죠.

2015년 6월 13일 영국 엘리자베스(가운데 흰 옷) 2세 여왕의 생일을 맞아 영국 왕실 가족들이 버킹엄궁 발코니에 모였다. 여왕과 남편 필립(여왕 오른쪽으로 둘째)공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AFP 연합뉴스

현재 영연방에는 세계 54국이 가입해 있습니다. 북미와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지구촌 모든 대륙에 회원국이 퍼져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대영제국이 식민지로 거느렸던 나라들입니다. 물론 회원국들이 지금도 영국의 통치나 지배, 지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계산기 두드리고 머리 굴려가며 이해 관계를 따져본 결과, 영연방으로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연방 회원국이라고 다 같은 회원국은 아닐 것입니다. 그 중 유독 친밀하고, 국제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하나로 뭉치는 나라는 영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입니다. 이들 4국은 미국과 함께 군사·정보 동맹체인 ‘파이브 아이스(Five Eyes)’를 구성하고 있지요. 최근에 중국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대해 ‘외교적 보이콧’을 선언한 나라들도 이들입니다. 이들 나라는 앵글로색슨이라는 인종적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작년에 미국과 영국, 호주가 ‘오커스’라고 하는 또 다른 군사동맹을 출범시킨 것도 “우리는 언제까지 진정한 원팀”이라는 의식이 작용한 결과라고 봅니다.

사실 캐나다에 먼저 진출한 건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1608년부터 세인트로렌스강(江) 중심으로 퀘벡·몬트리올 등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영국은 20년 정도 늦은 1628년 프랑스 식민지의 남동쪽, 대서양에 접한 노바스코샤 지역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이로부터 약 150년 후, 세계의 패권을 놓고 대결을 펼친 끝에 영국이 승리했고, 21세기에 제 조카 사위가 “영국과 캐나다는 정말 똑같은 것 같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제 세계 역사의 흐름을,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운명을 바꿔놓은 18세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눈여겨 볼 것은 여러 전쟁이 있었고, 전쟁을 벌이는 양쪽 멤버들은 계속 바뀌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항상 적(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전쟁의 시대

18세기의 전쟁은 이전과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동시에 지구촌 곳곳에서, 많은 나라들이 뒤엉켜 싸우는 세계 전쟁의 성격을 띄게 됐다는 점입니다.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유럽에는 대형 전쟁들이 잇따라 터졌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동맹 전쟁(또는 9년 전쟁, 1688~1697)을 시작으로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1701~1714),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748), 7년 전쟁(1756~1763), 나폴레옹 전쟁(1793~1815) 등입니다. 중세와 근대 초기 전쟁들은 주로 개별 국가간에 벌어지거나 소수 국가들이 참여하는데 그쳤고, 전장(戰場)도 일부 지역에 국한됐는데, 18세기를 거치면서 참전국도 크게 늘고, 전투도 유럽을 넘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양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개막전 같았던 것이 아우크스부르크 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을 통해 유럽 패권을 장악하려다 실패한 프랑스 루이 14세는 18세기가 문을 열자 곧바로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에스파냐에서 합스부르크가(家) 출신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왕위는 그의 유언에 따라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에게 넘어갔습니다. 루이 14세의 입장에서 보면 손자가 에스파냐 왕이 되면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자신의 부르봉 왕가가 유럽의 최강이자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고, 유럽 패권 장악이라는 자신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만의 꿈이었지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이를 눈뜨고 지켜볼 일은 없었습니다.

이제 짝짓기가 활발해집니다. 프랑스와 에스퍄냐 쪽엔 나폴리와 시칠리아, 헝가리, 바이에른, 쾰른 등이 동참했습니다.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에스파냐 지배를 받는 왕국이었고,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가)에서 분리·독립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바이에른·쾰른 등은 합스부르크가 강해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다른 편에선 잉글랜드(영국)가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고, 여기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와 네덜란드, 사보니아(사르데냐) 등이 합류했습니다. 에스파냐와 사이가 나쁜 포르투갈, 에스파냐에서 독립하려는 카탈루냐 등도 이 편에 섰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전세는 엎치락뒤치락했고, 전쟁은 위트레흐트 조약(1713)과 라슈타트·바덴 조약(1714)으로 종결됩니다. 결과는 영국과 오스트리아쪽 승리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는 펠리프 5세로 에스파냐 왕에 오르지만, 프랑스 왕위는 물려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루이 14세의 꿈이 좌절된 것입니다. 독일 하노버 왕조의 후예인 앤 여왕은 영국 왕위를 공식 인정받게 됐습니다. 영국은 또 프랑스로부터 허드슨만과 아케디아 등 미국 식민지 일부를 할애받고, 에스파냐에서 지브롤터·미노르카섬을 얻었습니다. 프로이센도 땅을 일부 얻었고, 네덜란드는 상업적 특권을 승인받았습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대한 식민지 특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프랑스와 에스파냐는 땅을 칠 노릇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존 처칠, 1대 말버러공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 때 영국에 특출난 전쟁 영웅이 한 명 등장했습니다. 말버러 공 존 처칠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윈스턴 처칠 수상의 먼 조상입니다.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데, 그럴만도 한 것이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에서 그는 단 한번도 패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2차 대전의 영웅 몽고메리 장군은 그에 대해 “대단한 외교적 수완을 가진 군사적 천재였다. 나는 영국군이 유럽 최고의 군대 가운데 하나로 부상한 것은 다름 아닌 말버러 덕분이라고 늘 생각해왔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유럽의 전쟁을 주도했던 프랑스 루이 14세는 죽기 직전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이 점에서 짐이 밟은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유언처럼 되지는 않았습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1740년 유럽에 다시 전운(戰雲)이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계기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문제였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6세는 사망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를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물려줬는데, 바이에른 등이 “여자는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내용의 관습법 ‘살리카법’을 들어 반대했습니다. 참고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두 1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요. 그 중 한 명이 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이런 갈등의 상황에서 꾸준히 군사력을 키운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의 알짜배기 땅 슐레지엔을 집어삼키면서 유럽이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됐습니다. 이번에 팀 구성은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쪽에 프랑스와 스페인, 제노바, 모데나, 스웨덴이 붙었습니다. 반대쪽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진영엔 영국과 하노버, 네덜란드, 러시아 등이 함께 했습니다.

1748년 엑스라샤펠(또는 아헨)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는데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을 얻어 최대 승자가 됐고, 마리아 테레지아도 합스부르크 가문 계승을 인정받아 오스트리아는 물론, 헝가리와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등의 왕에 올랐습니다. 그녀의 남편 프란츠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때 얻은 땅을 서로 되돌려 주었습니다. 영국은 캐나다 루이스버그 요새를 프랑스에 돌려줬고, 프랑스는 인도 마드라스를 영국에 반환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습니다. 슐레지엔을 잃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와신상담 복수의 칼을 갈았고,8년 후 잃었던 땅을 되찾기 위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도 최후의 승자를 가릴 결정적 한판을 준비했습니다.

◇제국, 위용을 갖추다

7년 전쟁은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복수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얽힌 당사자들이 많았습니다. 기본적인 대립 구도는 프로이센 대 오스트리아, 프랑스 대 영국이었습니다. 전쟁은 크게 세 곳에서 전개됐습니다. 유럽 대륙과 북미, 인도 등입니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참전하고, 해외 식민지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까닭에 영국의 처칠 수상이 ‘18세기의 세계대전’이라고 부른 이 전쟁은 결론적으로 영국·프로이센 편이 이겼습니다. 양측은 1763년 파리 조약을 맺었습니다. 특히 영국은 1759년 세계 곳곳에서 승전보를 울렸는데, 그 이후 전투는 ‘소탕 작전’ 수준이었습니다.

①유럽 대륙 (포메라니아 전쟁)

마리아 테레지아는 200여년간 합스부르크의 숙적이었던 프랑스를 우군으로 끌어들이고,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프로이센을 반드시 꺾겠다는 집념의 발로였습니다. 이에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라이벌인 영국과 동맹을 맺었지요. 전쟁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마요르카섬을 공격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프로이센은 작센을 순식간에 점령했지요.

‘합스부르크 왕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전쟁 중 프로이센은 한때 참패 수준까지 몰렸습니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에 연전연패했고, 나라는 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표트르 3세가 뒤를 이은 러시아가 갑자기 전쟁을 중단하고 이탈하는 바람에 전황이 확 바뀌었습니다. 자살 생각까지 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기력을 회복하고 전세를 뒤집었습니다. 프랑스군도 영국·하노버 연합군에 대패하면서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전후 조약에 따라 참전국들은 유럽을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로 했지만,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점령은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②북미 (프렌치-인디언 전쟁)

7년 전쟁 개시 1년 전 북미에선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 전쟁은 7년 전쟁과 맞물렸고 1763년 함께 끝났습니다. 프랑스·영국 대결은 필연적이었습니다. 프랑스 이민자들은 북미 인디언들을 상대로 모피 교역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했고, 영국 이민자들은 정착촌을 확대하면서 영역을 넓혔지요. 두 세력은 오하이오강 유역에서 맞부딪쳤습니다.

초기에 프랑스가 우세했습니다. 세인트로렌스와 오하이오 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계속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1758년 8월부터 전세가 바꾸었습니다. 영국은 그해 8월 노바스코샤의 루이스버그에서, 이듬해에는 크라운포인트(현재의 뉴욕주)와 타이콘데로가 요새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승부를 가른 결정적 대결은 1759년 9월 프랑스군의 핵심 거점인 퀘벡 요새에서 벌어졌습니다. 당시 32세의 제임스 울프가 이끄는 영국군이 몽캄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격파했습니다. 이날 전투는 영국군이 ‘일제 사격’으로 프랑스군을 한방에 무너뜨린 유명한 전투입니다. 울프 명령에 따라 영국군 5000여명은 적이 코 앞에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적이 40야드(약 37미터) 안으로 들어오자 일제 사격을 실시했고, 프랑스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이것으로 전투는 끝났습니다. 전투다운 전투는 15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망자는 영국군 650명, 프랑스군 1500명 수준이었습니다. 짧고 강렬한 작은 교전이었지만 전투 결과 캐나다의 지배권은 영국으로 넘어갔고, 그런 점에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울프와 몽캄 모두 치명적 부상을 입고 전사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조국에서 영웅으로 칭송을 받습니다. 이듬해 영국은 몬트리올에서도 프랑스를 몰아냈습니다. 프랑스가 완전히 쫓겨난 북미는 이제 대영제국의 품에 들어가게 됩니다.

③인도

프랑스와 영국은 1600년대에 인도와 교역을 시작했습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인 1600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했고, 프랑스는 1664년에 세웠습니다. 두 나라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에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도 인도의 지배권을 놓고 맞붙었습니다.

1756년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벵골의 태수 시라지-웃-다울라가 병력 5만명을 이끌고 캘커타의 영국인들을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의 서기에서 군대 지휘관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 로버트 클라이브가 승부를 뒤집었습니다. 그는 1757년 캘커타를 되찾은 데 이어 그해 6월 최대 승부처였던 플라시 전투에서 시라지-웃-다울라 군대를 격파, 결정적 승리를 거뒀습니다. 1761년에는 퐁디셰리까지 점령함으로써 영국은 인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인도는 거의 200년 동안 대영제국의 거대한 시장이며, 군사·경제·문화의 보고가 될 것입니다.

④그외

영국군은 카리브해에 있는 프랑스와 에스파냐 식민지도 공격했습니다. 프랑스의 풍요로운 설탕섬들, 즉 과달루페와 마르티니크, 도미니카를 정복했습니다. 에스파냐령 쿠바를 손에 넣었고, 필리핀 마닐라를 공격해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습니다. 포르투갈 근해와 프랑스 서부 연안에서 벌어진 해전에서도 모두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윌리엄 피트

7년 전쟁에 임하는 영국의 핵심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프로이센을 지원해 프랑스와 동맹국들을 유럽 대륙에 묶어 놓는다. 그사이 영국은 전 세계 식민지에서 승리를 쟁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관건은 이런 전략을 뒷받침할 우세한 해군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였습니다. 해군이 강해야 상대방 병력 이동을 바다에서 차단해 적을 분산·약화시키고, 아군 전력을 집중해 완승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았던 걸까요.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영국에는 전략을 짜고 실행에 옮기며 나라를 이끌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채텀 백작인 윌리엄 피트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칠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영국을 이끌었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틀을 만들어냈습니다.

윌리엄 피트, 1대 채텀백

우선, 1755년 12월 하원에 출석한 그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우리는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가능한 한 충분히 그리고 제대로 인원이 배치된 해군을 양성해야 합니다.”

피트는 의회에서 5만5000명의 해군 육성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영국 해군의 선박 보유량은 7년 전쟁 시작 초기 25만톤이었는데 종전 무렵 34만톤으로 늘었습니다. 프랑스는 최대 보유량이 14만7000톤에 불과했습니다. 영국 해군의 절반 수준이었던 것이죠. 최신예 전투함인 전열함은 프랑스가 70척, 영국은 105척을 보유했습니다.

피트를 향한 영국인들의 찬사는 대단합니다. 몽고메리 장군은 “그는 정치가이자 탁월한 전쟁 지도자로서 영국 역사상 암흑기에 집권했고, 처칠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웅변으로 영국인들을 이끌어 단결시켰다”고 평가했습니다.

피트는 ‘위대한 하원의원’으로 불렸습니다. 7년 전쟁 당시 그는 총리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국왕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직책은 지금으로 따지면 여당 원내 대표와 내무장관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의회와 내각, 영국을 이끄는 실질적 리더였습니다. 그는 전쟁 직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그일을 ….”

피트의 막강한 영향력은 탁월한 연설 능력과 국민들의 직접적인 지지에서 나왔습니다. 역사학자 바질 윌리암스는 “영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왕의 지명이나 의회의 선택이 아닌, 국민들의 목소리에 의해 최고 권력에 오른 사람은 피트가 처음이었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어떤 정치인도 피트만큼 단시간에 국민들의 신뢰와 존경을 한꺼번에 받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런던은 사상 처음 ‘명예 런던시 자유상’을 그에게 수여했습니다. 이런 상을 주는 도시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체스터, 우스터, 노리치, 베드포드, 솔즈베리, 스털링, 야머스, 튜크스베리, 뉴캐슬….

그는 청렴으로도 국민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튼칼리지와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그는 만 27세 때 하원에 입성했고,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진행 중이던 1746년 재무성 육군 담당 회계 총괄 책임자를 역임했습니다. 당시 이 직책을 맡는 사람은 운용 자금의 이자를 챙기고, 외국으로 가는 보조금의 0.5%를 받았습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관행이었습니다. 하지만 피트는 단 한 푼도 이런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연히 동료 의원들과 내각, 국민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했지요.

피트는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봤고, 미래를 위한 전략에 탁월했습니다. 당시 영국엔 2차 세계대전 때 독일 히틀러와 협상하고 양보했던 챔벌레인 총리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뉴캐슬 공작인 토머스 펠햄 홀스 총리였습니다. 그는 유럽 대륙에 있는 영국 동맹국들에 자금을 지원하는 조약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면 그 동맹국들이 나서서 프랑스가 영국을 침략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주화론(主和論)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피트는 프랑스와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756년 초 피트는 홀스 총리가 미노르카 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고, 이는 곧 프랑스의 침공을 부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그해 6월 미노르카는 프랑스군 기습을 받아 함락되었습니다. 이 일로 홀스 총리를 자리에서 물러났고, 피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이제 정권을 좌우하게 된 피트는 1758년부터 자신의 전략을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고, 초기에 곳곳에서 프랑스군에 밀리던 영국군은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습니다.

피트는 1761년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미 7년 전쟁의 판세를 영국의 승리로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즉 1766년 총리에 올라 2년간 재직했습니다. 당시 영국 의회는 북미 식민지에 대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려했는데, 피트틑 이에 반대했고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