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는 아우성’, ‘조용한 외침’, ‘침묵의 절규’… 모순과 역설의 표현법을 배울 때 예시로 감초처럼 등장하는 표현법들이죠. 도무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비현실적 상황을 그리는 것 같지만, 적어도 한 상황에서만큼은 시적 허용이 아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생생한 묘사입니다. 바로 비오는날의 지렁이들이죠. 날이 따뜻해지고 습해지면 우리 주변에서 보게 될 풍경들입니다. 들이치는 빗방울에 흙이 물기를 잔뜩 머금자 질식의 공포를 느끼고 꾸불텅대면서 기어나온 그들. 그러나 대다수는 흙속 보금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아스팔트 위에서 거칠게 몸부림치다가 타오르는 햇살에 꾸덕꾸덕 말라죽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유해 외래종으로 퇴치작업이 한창인 아시아산 지렁이. /미 국립공원관리청

지렁이들에게 성대나 울음통이 있었더라면, 비온 뒤 사방이 기괴한 절규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 침묵의 절규 속에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괴이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며 육포처럼 말라붙은 지렁이의 사체는 봄여름날의 익숙한 풍경이죠. 결코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새들의 밥이 되어주고 꽃들의 비료를 몸소 생산해주는 이 고마운 지렁이. 그러나 북미대륙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공포와 혐오와 대상으로 등극했습니다. K팝에 이은 K지렁이의 글로벌 진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요. 미국과 캐나다 곳곳에 한국·일본을 원산지로 한 아시아지렁이의 왕성한 번성에 현지의 농업계는 패닉상태입니다. 캐나다 유력지 글로브 앤 메일이 얼마전 환대(지렁이 몸을 감싸고 있는 특유의 옅은 색 고리띠)가 뚜렷하게 보이는 큼지막한 지렁이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헤드라인을 붙였습니다. “기이한 침입종 지렁이가 처음으로 꿈틀거리며 노바스코샤주에 나타났다.”

머리쪽에 특유의 환대(고리띠)를 한 지렁이는 한세기전까지만 해도 전혀 존재하지 않던 종이었다. /코네티컷주 홈페이지

미국 본토 곳곳에 출몰해 터를 잡은 놈들이 기어이 캐나다 남동부까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죠. ‘아시아 펄쩍 땅벌레(Asian Jumping Earthworm)’. 우리에게 친숙한 지렁이를 이 지역에서 외래종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비온 뒤 땅으로 기어나왔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온몸으로 절규하는 모습을 일종의 점프로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이름들도 있어요. ‘미친 벌레(Crazy Worm)’, ‘뱀벌레 (Snake Worm)’, ‘미친 뱀벌레(Crazy Snake Worm)’ 등입니다. 19세기 아시아와 인적교류가 왕래할 때 한국와 일본의 토양에서 묻어간 뒤 북미에 자리잡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글로브 앤 메일 뿐 아닙니다. 코네티컷·네브래스카·위스콘신 등 미 곳곳의 지역 언론과 대학, 농업담당 소식지는 올해도 이 괴물 외래종벌레를 어떻게 소탕해야할지 가이드를 곁들인 정보성 기사를 내보냅니다.

손바닥에서 꼬물거리는 지렁이. 특유의 환대(고리띠)가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네브래스카주립대 홈페이지

호감이 가는 외모는 아니지만, 강력한 독성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집채만한 덩치에 공격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 작은 벌레를 두려워하고 있는 걸까요? 그건 이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땅의 기운을 흡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렁이의 주식은 흙이나 썩은 나뭇잎입니다. 몸의 양끝은 각각 입과 항문인데, 입으로 흙과 썩은 잎사귀에서 영양분을 빨아들인 뒤 소화해서 기다란 똥으로 내보냅니다. 보통 자기 몸무게에 맞먹는 똥을 배출해내죠. 이 지렁이똥은 각종 영양분들을 품고 있어 식물들의 생장을 돕는 비료로도 활용되고 있죠. 하지만, 바다건너 북미 대륙에서는 그렇지가 않다고 하네요. 땅의 기운을 파괴하는 괴력난신이 돼버렸습니다. 미 코넬대와 네브래스카주립대, 오하이오주립대 소식지 등은 지렁이의 해악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밀집번식하면서 흙과 썩은 나뭇잎에 있는 유기물을 가열차게 흡입하면서 지력을 확 떨어뜨립니다. 지렁이의 실체를 알리는 위스콘신주 자연보호부의 동영상입니다.

특히 작은 미생물들과 벌레들의 중요한 서식처인 나뭇잎을 자기 뱃속으로 우겨넣으면서 이들의 터전이 송두리째 없어집니다. 더불어 농작물과 꽃이 뿌리로 흡수해야 할 양분들을 모조리 뺏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흙과 낙엽을 빨아들여서 기다란 몸뚱아리 끝에서 똥을 줄줄 뽑아내는데, 국숫가락 면발처럼 기다랗고 촉촉한 본토박이 지렁이 똥과 달리 이곳 지렁이들이 배설한 똥은 커피찌꺼기처럼 말라붙다시피해있고 수분도 영양분도 증발해있다고 합니다. 지렁이들이 점령한 곳에서는 비옥한 토양이 점차 퍽퍽한 똥밭으로 변합니다. 농작물과 꽃과 나무가 땅의 힘을 받지 못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식물의 죽음은 다시 이곳을 벌레와 양서류, 새, 포유동물 등 이곳을 기반으로 살던 짐승들의 씨를 마르게 합니다. 연방정부에서도 지렁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미국 삼림청도 얼마 전 “외래종 지렁이가 자기들만의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섬뜩한 제목의 계도문을 냈습니다. 이 글에서 삼림청 소속 맥 칼라함 박사는 “이 게걸스러운 지렁이들은 다 먹어치운다. 절대로 성에 차지 않아한다”며 두려움과 적개심을 얼핏 드러내기도 합니다.

캐나다 글로브앤메일 홈페이지에 노바스코샤주에서 처음 지렁이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게재돼있다. /글로브앤메일 홈페이지

미국인들과 캐나다인들이 ‘지렁이포비아’ 증상을 보이는데는 지렁이라는 종 자체가 북아메리카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까닭도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살던 곳에 백인들이 도착해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후 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 사람과 물자가 오면서 지렁이들도 함께 온 것이죠. K 지렁이, 그러니까 아시아산 지렁이들만 온게 아니었습니다. 유럽에서도 흙을 파먹고 똥을 싸면서 오랜세월 터잡은 유럽산 지렁이들도 대서양을 건너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1세기 남짓 벌어진 아시아산 지렁이와 유럽산 지렁이의 경쟁은 생존력·번식력·식욕 등 전 부문에서 완벽하게 앞서간 아시아산 지렁이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번식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사계절만 살고 죽는 한해살이지만, 이들이 낳아놓은 알은 겨우내 추위를 견뎌낸 뒤 섭씨 10도쯤으로 기온이 오르면 부화합니다.

지렁이똥의 모습. 꼬불꼬불한 라면가락같은 한국 지렁이똥과 달리 커피찌꺼기와 비슷한 모양이다. /오하이오주립대 홈페이지

게다가 이 족속은 번식을 위해 이성간의 만남과 사랑싸움, 짝짓기, 어장관리 같은 번거로운 절차가 전혀 필요없는 자웅동체랍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국과 일본에 뿌리를 둔 지렁이들이 흙밑에서 양분을 거침없이 빨아들이면서 토질을 서서히 황폐화시키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각 주의 농업당국은 생명의 존엄성이 고 뭐고 이들은 보는대로 처치하라고 적극적으로 권고합니다. 특히 제거 방법으로 널리 계도되는게 있는데요. 흙에다 겨자 섞은 물을 들이부어서 지렁이알을 제거하는 것. 그리고 플라스틱 집열판을 설치해 태양광을 흡수해서 흙을 따끈하게 데워서 역시 지렁이와 알을 퇴치하는 것입니다. 지렁이가 숲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지 전문가의 설명을 곁들인 미 농무부 동영상입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K지렁이의 영역은 점차 넓어지는 양상입니다. 이들의 모습에서 1960년대 미국흰불나방이 출몰하고 1980년대에 황소개구리가 논을 점령하면서 외래종 퇴치에 골몰하던 우리나라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미국 사회를 인종의 용광로라고 부르듯, 지금 미국 야생은 오대양육대주에서 몰려든 온갖 외래동물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지렁이처럼 아시아산으로 미국의 강에 자리잡아 최상위 포식자가 된 가물치가 있고요. 버마비단구렁이·테구도마뱀·이구아나 같은 거대 파충류들도 토착 생물들을 위협하며 우세종으로 자리잡고 있죠. 그러고보면, 이런 외래종의 침입과 도래는 어쩌면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기보다는, 고도의 지능을 가진 동물들에게 인간이 운반도구로 활용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