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쇼박스

1993년 7월 PC통신 하이텔의 공포·SF 게시판에 생소한 글이 올라왔다. 파문당한 가톨릭 신부와 혈도가 뒤틀린 태극권 수련자가 악귀를 물리친다는 소설이었다. 정식으로 등단도 하지 않은 공대생이 쓴 글이었으나 반응은 바로 달아올랐다. 평균 조회수 4000회, 고정 독자 1만명이라는 폭발적 인기에 이듬해 1월 책으로도 나왔다. 9년 대장정 만에 19권으로 완간한 대하 소설 ‘퇴마록’이다. 연재 시작 때 서울대 기계설계학과 대학원생이었던 작가 이우혁(59)은 이후 ‘오컬트의 원조’로 꼽히게 됐다.

◇성인·글로벌 관객까지 겨냥한 3D 애니

누적 판매 1000만부 신화의 ‘퇴마록’(21일 개봉)이 국내 제작진이 만든 3D 애니메이션으로 관객을 만난다. 첫 연재 이후 32년 만이다. 작가 이우혁도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원작자 인증’ 버전이다. 제작은 국내 대표 3D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로커스스튜디오에서 맡았다. 로커스가 만든 3D 애니 ‘레드슈즈’는 2021년 미국 아카데미 장편 애니 부문 1차 후보에도 진출했다. 이번에 만든 ‘퇴마록’도 지난해 6월 세계 최대 애니메이션 영화제인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돼 일찌감치 기대를 모았다.

애니 ‘퇴마록’은 어린이가 주타겟인 국내 애니 관객층을 성인으로 확대하고 글로벌 시장에도 선보이기 위해 공을 들였다. 기획 단계부터 6년간 680명이 투입됐다. 야심이 큰 만큼, 이야기는 핵심에만 집중했다. 1부 ‘국내편’의 첫 장(章)인 ‘하늘이 불타던 날’만 보여준다. 퇴마사들이 왜 어둡고 질긴 싸움에 뛰어들었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캐릭터를 관객에게 밀착시키는 데에 초점을 뒀다. 30년 전 원작인데도 “생명을 경시하고 정신과 영혼의 가치를 무시하는 지금의 세상을 구하겠다”는 인물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울림이 깊다.

'퇴마록'의 박윤규 신부는 원작에 없는 수염을 길렀다. 캐릭터의 성장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담겼다.

‘퇴마록’이 장편 데뷔작인 김동철(36) 감독은 4명의 퇴마사가 이루는 공동체를 유사 가족처럼 해석했다. 김 감독은 본지 인터뷰에서 “제가 본 ‘퇴마록’은 따뜻한 가족 드라마”라며 “각자 과거가 있는 퇴마사들이 상처를 감싸주며 뭉치는 성장 이야기를 살리려 했다”고 말했다.

◇2D 따뜻한 감성과 3D 기술력 결합

2D 애니가 스케치북을 열고 손에 든 펜으로 그려나간다면, 3D는 서버를 켜고 데이터를 불러내 마우스로 작업한다. 홍성호(59) 로커스 대표는 “로커스는 근본적으로 IT 회사”라며 “작화는 물론 최적화된 작업 공정 등 축적한 데이터를 K애니의 자산으로 키워왔다”고 말했다.

‘퇴마록’은 3D 애니지만 2D 감성을 살리기 위해 애썼다. 2D 애니에서 개발된 기법인 스미어 프레임(빠른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잡아 늘리거나 왜곡시키는 기법)을 3D 액션 중간중간 끼워넣어 자칫 게임 화면으로 보이기 쉬운 작화의 균형을 살렸다. 이야기는 판타지더라도 배경은 현실감을 강조했다. 밀교 사찰에 걸린 탱화는 일일이 새로 그렸으며, 깊은 산과 우거진 수풀 등은 전국 명산을 다니며 실제로 스케치한 모습을 반영했다.

공개된 캐릭터 중엔 근육질 우람한 체형의 퇴마사 박윤규 신부에 대한 반응이 좋다. 김 감독은 “원작에 없던 박 신부의 수염 등 현대적인 해석이 요즘 관객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말했다. IT 기술 도입에 적극적인 로커스지만 ‘퇴마록’에는 AI를 전혀 쓰지 않았다. 홍 대표는 “애니 캐릭터는 AI를 쓰면 저작권 시비에 걸리기 쉽다”며 “야심작의 독창성을 인정받기 위해 AI는 배제했다”고 말했다.

전 세계 영화 시장에서 애니메이션은 신기록을 세우며 관객을 늘려가고 있다. 중국 애니 ‘너자2’는 개봉 열흘 만인 지난 8일 매출 10억달러를 돌파하며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북미)를 제치고 ‘최초의 단일 시장(중국) 매출 10억 달러 영화’ 기록을 세웠다. 앞서 미국 애니 ‘인사이드 아웃2′도 전 세계 박스오피스 17억달러를 달성했다 . 홍 대표는 “K애니는 전 세계 5~6위권이지만 미국 대형 스튜디오의 10분의 1 비용으로 퀄리티는 80%까지 가능한 기술력을 갖췄다”며 “’퇴마록’처럼 원작까지 탄탄하면 글로벌 관객도 더욱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퇴마록

1993~2001년 작가 이우혁(59)이 집필한 대하 판타지 소설. 누적 판매 1000만부를 넘겼다. 퇴마사 4명이 악귀를 퇴치하는 내용으로, 국내·세계·혼세·말세 등 4부작 구성에 총 20권(해설편 포함)으로 마무리됐다.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무협지 활극의 재미를 더하고 오컬트 요소를 가미해 국내 장르소설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