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바둑 인구는 600만~700만명으로 중국 바둑 인구(6000여만명)의 10분의 1 정도다.중국에는 바둑 유단자만 1500만명이 넘고 매년 아동 300여만명이 입문한다. 세계 바둑계가 중국판이지만, 세계 바둑 랭킹사이트(고레이팅·GoRatings) 맨 꼭대기엔 한국인이 있다.

신진서 9단이 2025년 3월 13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인터뷰에 임하고 있다. 2000년 3월 태어난 그는 고(故) 조남철 대국수를 시작으로 김인,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박정환으로 이어지는 한국 바둑 1위 계보를 잇는다. 메이저 세계대회 기준으로 현재 8회 우승했는데, 그보다 더 많은 우승을 차지한 기사는 이창호(17회), 이세돌(14회), 조훈현(9회) 3명 뿐이다./송의달
신진서 9단이 2025년 3월 13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인터뷰에 임하고 있다. 2000년 3월 태어난 그는 고(故) 조남철 대국수를 시작으로 김인,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박정환으로 이어지는 한국 바둑 1위 계보를 잇는다. 메이저 세계대회 기준으로 현재 8회 우승했는데, 그보다 더 많은 우승을 차지한 기사는 이창호(17회), 이세돌(14회), 조훈현(9회) 3명 뿐이다./송의달

주인공은 이번달 17일 25세가 되는 신진서 9단이다. 2019년 1월부터 7년째 세계 1위인 그는 14억 중국의 최고 기사(棋士)들을 줄줄이 무너뜨리는 대한민국의 최강 파이터[戰士]이다. 매년 2월 중국 상하이에서 한중일(韓中日) 3개국 5명씩 15명의 기사가 국가 대항전으로 맞붙는 ‘농심신라면배 세계 바둑최강대회’가 전쟁터이다.

◇세계 바둑계의 유일한 ‘차이나 올 킬러’

작년 2월 한국팀 4명이 1승도 못 올린 상태에서 마지막 주자로 나선 신진서는 중국 기사 5명을 차례로 모두 꺾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특정국 선수 5명이 다른 나라 팀 1명에게 모두 진 것은 25년 이 대회 역사상 처음이었다. 지난달 열린 같은 대회 결승전에서도 신진서는 중국 기사 2명을 완파해 ‘차이나 올 킬러(all killer)’ 면모를 과시했다.

신진서 9단(오른쪽에서 두번째)이 동료인 박정환 9단, 설현준 9단 등과 함께 2025년 2월 21일 중국 상하이의 그랜드 센트럴 호텔에서 열린 '제2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승리한 뒤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있다. 신 9단은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이 대회에서 한국팀 마지막 주자로 나와 18차례 싸워서 18연승을 거두었다. 이 대회 1위 우승팀은 상금 5억원을 받지만, 2위팀에게 주어지는 상금은 0원이다./뉴스1
한국 바둑의 '수호신' 신진서 9단이 '바둑 삼국지'에서 파죽의 18연승으로 한국의 5회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2025년 2월 21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26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3라운드 최종 14국에서 중국의 마지막 주자 딩하오 9단과 242수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백 불계승을 거뒀다./한국기원

이달 13일 낮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신진서 9단은 180cm 정도 키에 베이스에 가까운 저음(低音) 목소리, 군살 없이 마른 몸매를 갖고 있었다. 최근 상승세를 보이는 비결을 묻자, 그는 “몇년 전 보다 자신감이 붙어 심리적으로 안정된 덕분인 것 같다. 자만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의 세계 메이저 대회 첫 우승은 20세 한 달 전인 2020년 2월 LG배 대회에서였다. ‘바둑의 신(神)’으로 불리는 이창호 9단이 17세에 최연소 세계 챔피언이 되고 19세에 최다관왕(13관왕) 기록을 세운 것에 견줘보면, 신진서는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이다.

◇대기만성형...최근 20전 20승

그의 최근 기세(氣勢)는 무서울 정도다. 지난달에 열린 농심신라면배와 제1회 난양배에 모두 우승해 통산 8번째 메이저 봉(峰)에 등극했다. 올해 들어 이달 15일까지 16번 대국 전승(全勝)에다 작년 12월 전적까지 더하면 20연승을 기록하고 있다.

세계 바둑계 사상 최초로 연간 승률 90% 달성 애기도 나온다. “아직 이창호 9단이 세운 세계 메이저 기록(17회)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며 겸손해하는 그에겐 3가지 성공법이 있다.

신진서 9단이 2025년 2월 28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회 난양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 3번기 2국에서 중국의 신예 강자 왕싱하오 9단에게 227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둬 난양배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신 9단이 승리후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한국기원

◇①지독한 승부욕

부산에서 태어나 4세 때 처음 바둑돌을 잡은 신진서는 1년 만에 초등학교 저학년부 대회를 제패했다. 이어 부산시 영남초등학생 대회서 우승하면서 ‘바둑 신동’으로 소문났다. 2012년 영재(英才) 입단대회로 프로기사가 됐지만 그는 2011년 입단대회 탈락이라는 쓴 잔을 마셨다.

그날 집에 돌아온 신진서는 매일 한 마리씩 먹던 닭을 반마리만 먹었다. “한 마리를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살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하며 괴로웠다. 많이 운 것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다.”

프로 입문 후에는 ‘천적’이던 박정환 9단에게 내리 10연패를 당했다. 2016년 LG배 4강에선 치명적인 악수(惡手)로 패한 뒤 3~4년 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2016년 열린 제21회 LG배 바둑대회에서 신진서 9단(맨 왼쪽)이 4강 진출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그는 4강전에서 당이페이를 만나 탈락한 후 3~4년간 슬럼프를 겪었다./조선일보 DB
신진서 9단(오른쪽)이 2019년 1월 중국 구이저우성에서 열린 제4회 바이링배 결승에서 중국 커제 9단과 맞대결하고 있다. 그는 결승전에서 패해 준우승을 차지했다./한국기원

2020년 삼성화재배 결승 1국에선 코로나 시기 온라인 대국 중 마우스 선이 노트북 패드를 건드리면서 엉뚱한 곳이 착점이 되면서 중국의 커제 9단에게 3국까지 내리 내줬다. 그는 “나는 바둑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게 아니라 계속 밟히면서 컸다”고 했다.

◇“이기기 위해 밤을 새워 칼을 간다”

신진서의 비범함은 이런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더 강해졌다는데 있다. “패배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분하고, 이기기 위해 밤을 새워 칼을 갈며, 승리를 위해서는 가랑이가 찢어져도 달려가는” 특유의 기질을 십이분 살린 것이다. 그의 말이다.

“바둑기사로 살아가며 타고난 머리 이상으로 중요한 게 승부욕이다. 이기고자 하는 마음가짐. 승부에서 지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어 스스로를 극한(極限)까지 몰아넣어 이겨야 하는 근성(根性) 말이다.”

그는 “거의 모든 프로기사들의 수(手)는 비슷하다. 승부는 아주 약간의 차이에서 판가름난다. 상대를 반드시 넘어서겠다는 간절함이 조금이라도 더 강한 사람이 이긴다”고 했다.

2020년 제24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승에서 신진서 9단(오른쪽) 대 박정환 9단이 최종국을 두고 있다. 20번째 생일을 한 달여 앞두었던 신 9단이 승리해 세계 바둑 역사상 10번째로 20세 이전 세계 메이저 타이틀을 차지했다./한국기원

신진서는 7~8세 때부터 10시간씩 바둑 문제 풀이에 매달렸다. 인터넷 바둑 대국(對局)에서 5연패, 6연패하면 이길 때까지 밤 새며 씨름하다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잔 적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국에서 질 때마다 항상 눈물 흘리며 울었던 그는 지금도 패하면 새벽 5시까지 잠을 자지 않는다. 그때까지 복기(復棋)·AI 연구 등을 하며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되새긴다. 그에게는 공부가 바둑 패배의 아픔을 치유하는 최고의 특효약(特效藥)이다.

신진서 9단은 2012년 프로 바둑 입문 직전 5개월동안 충암연구회(충암도장)에서 바둑 공부를 했다. 1988년 출범한 충암연구회는 한국 바둑이 세계 최강으로 발돋움하는 데 밑거름 역할을 했다. 모임을 주도한 이창호, 최규병 등의 모습이 보인다./조선일보 DB

◇“오묘함 발견해야 승리 기쁨 맛 봐”

신진서는 충암연구회(충암도장)에서 보낸 5개월을 제외하면 주로 인터넷 바둑으로 독학했다. 빠르게 착점(着點)하는 ‘초속기(超速棋) 바둑’에 익숙하다 보니 조급(躁急)함으로 실수를 많이 했다. 그래서 그는 세계 정상에 오를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그는 “이겼을 때 쉽게 자만하는 등 내 성격이 바둑에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더 집중하자’ ‘더 침착하자’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더 나은 내가 되자’고 적어도 천 번 넘게 다짐했다. 거침없고 공격적인 기질만 남겨두고 다른 단점들은 끊임없이 도려냈다”고 했다. 신진서의 말이다.

“바둑은 참 힘들다. 단 맛이 다 빠진 껌을 씹고 또 씹어서 나오는 오묘(奧妙)한 맛을 발견하는 사람만 승리의 기쁨을 맛본다.”

신진서 9단이 2024년 8월 발간한 자서전 <대국 : 기본에서 최선으로>의 앞면 표지. 신진서 9단은 2024년 한해 동안 82국을 소화해 14억 5658만2600원의 수입을 올렸다. 그는 1국당 약 1776만원, 한 수당 17만5618원을 벌어들였다./휴먼큐브

◇②엄청난 몰입과 공부

그의 친구들 사이에는 ‘진서가 바둑판을 들여다 볼 때는 청력(聽力)이 사라진다’는 농담이 있다. 바둑 공부를 할 때 귀청 떨어질 정도로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고 어깨를 두드릴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신진서를 빗댄 것이다.

다른 기사들도 바둑 공부를 많이 하지만, 신진서의 집중력과 몰입력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가끔 마시는 술 이외에 그는 거의 모든 잡기(雜技)를 끊고 산다. 소유차량이 없고 운전면허는 따지도 않았다. 극도의 섬세함과 안정감이 필요한 직업에 전심(專心)을 다할 뿐, 바둑 외에 모든 불필요한 것을 없앤 담백한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겐 바둑 하나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란다. 어린 시절 신진서에겐 하루 10판 대국은 기본이었다. 만 9세 때 시작해 20세까지 그가 인터넷에서 소화한 판 수는 적어도 2만판이 넘는다. 그는 “박정환 9단에 연패를 끊는 유일한 방법은 (바둑을)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것 뿐이었다”고 했다.

◇‘구도자’의 삶...“자나깨나 바둑 생각”

신진서 9단이 10세 무렵 짜서 실천한 1일 생활 계획표. 아침부터 밤까지 바둑, 바둑, 바둑이다./조선일보 DB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최근 높은 승률을 보이는 비결로 두 가지를 꼽았다. 하나는 강자(强者)들을 한 번씩 꺾을 때마다 자신감이 크게 붙어 심리적 여유를 갖게 된 점이다. 다른 하나는 항상 같은 패턴으로 시간 관리 등을 규칙적으로 바꾼 효과이다. “예전엔 새벽 3시, 아침 7시로 크게 달랐지만 최근 10년 동안엔 1시간 또는 2시간 만 바뀌었다.”

작년 2월 농심신라면배 결승에선 혼자 5일 연속 매일 결승대국을 할 때엔 오전 10시40분 감독과 식사 및 경기 준비→대국 후 저녁 6시 식사→1시간 주변 산책→밤 8시 복기 및 AI 연구라는 루틴을 반복했다. 그는 “메뉴를 고르는 에너지 조차 아까워 카레와 한식으로 통일했다. 그렇게 비워낸 공간을 오로지 바둑에 대한 생각으로 채웠다”고 했다.

2025년 2월 21일 중국 상하이의 그랜드 센트럴 호텔에서 열린 제2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공개 해설장을 가득 메운 중국 바둑팬들/뉴스1

그는 길을 걷다가 묘수(妙手)가 떠오르면 메모하고, 밥을 먹다가도 풀리지 않았던 길이 보이면 숟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바둑에 몰두한다. 꿈에서도 자주 대국(對局)한다고 했다.

◇“한 번 우승하면 또 더하고 싶어진다”

“하루 종일 바둑 생각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신진서 9단은 “게임이나 음악 등을 가끔 즐긴다. 그러나 아무리 재미있는 일을 해도 멈춰야겠다고 생각하면 금방 바둑으로 돌아온다”고 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에 잠시 들르는 것처럼, 바둑기사는 바둑 생각만 하며 살다가 다른 일상을 잠깐 사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인식이 체화(體化)돼 있다는 고백이다. 그는 “모든 것을 쏟은 시합에서 이겼을 때 쾌감·성취감 같은 도파민이 크다”며 이렇게 말했다.

“메이저 세계 대회에서 우승(優勝)하면 대단할 줄 알았는데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한 뒤 똑같은 생활이 이어지면 지루하고 허무한 감정이 든다. 그래서 한번 우승하면 또 더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진다.”

그는 “마음 한 구석엔 조훈현·이창호·이세돌 같은 대선배들을 따라잡고 싶지만 그걸 목표로 하다가는 쉽게 지칠 수 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1년1년 최선을 다하며 승수(勝數)를 쌓고 싶다”고 했다.

조훈현 9단(왼쪽)은 제자 이창호 9단과 평생 311판(119승 192패)을 겨루는 등 모든 기록 부문에서 경쟁을 계속해 왔다. 사진은 2016년 ‘한국 바둑의 전설’ 리그 때 두 사제(師弟)가 대국하는 모습이다./한국기원

◇③AI 활용 극대화

신진서 9단이 한국 바둑의 대들보로 우뚝 선 데는 부모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빼놓을 수 없다. 인터넷 바둑 7단인 아버지와 1급 실력의 어머니는 부산 사상구에서 바둑학원을 운영하다가 아들을 위해 2012년 2월 부산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왔다. 이들은 작년 5월 한국기원까지 걸어서 10분쯤 거리에 있는 아파트를 구입해 정착할 때까지 응암동·장안동 등으로 5차례 전셋집을 옮겨 다녔다.

신진서 9단(왼쪽)과 그의 아버지 신상용씨가 2018년 운동하기 위해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에 함께 올라서 찍은 사진이다./조선일보 DB-신상용 제공

프로기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는 한국기원 주변에 가족이 2019년 자리잡은 뒤, 신진서는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했다. ‘신부모오천(申父母五遷)’ 효과였다. 아버지는 어린 신진서에게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내고 그것을 끝까지 풀어낼 것을 요구했다.

◇아버지의 혹독한 담금질

아들이 이를 악물고 발버둥침으로써 실력이 도약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신진서의 말이다.

“바둑에 집중하지 못하던 어느날, 아버지는 새벽 2시에 갑자기 나를 집에서 내보내 바둑학원에 가서 공부하라고 했다. 나는 그 길로 밤길을 걸어 학원에 들어가 불을 켜고 혼자 바둑판 위에서 딱딱 소리를 내며 한참 바둑을 두었다. 그러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 들었다가 등교했다.”

2016년 3월15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왼쪽) 최고경영자가 인공지능(AI) 알파고로 이세돌 9단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후 이 9단의 사인이 담긴 바둑판을 선물받으며 밝게 웃고 있다. ‘세기의 바둑 대결’은 AI의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 열렸지만, AI가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조선일보 DB
서울시 영등포구 서울디지털동행플라자 서남센터에 마련돼 있는 AI바둑 로봇/서울디지털동행플라자

또 다른 도움은 인공지능(AI)이다. 요즘 바둑선수와 해설자들이 최고수로 여기고 기준으로 삼는 AI에 신진서는 가장 최적화돼 있고, 이를 가장 잘 활용하는 기사로 꼽힌다.

◇“AI는 나를 더 열심히 하게 만든다”

“처음엔 나도 AI에 거부감을 가졌다. 그러나 AI는 나를 더 채찍질하고 열심히 하게 만드는 1등 공신이다. AI와의 대결 대신 장점을 찾아야 한다. AI 추천 수(手)에 머물지 않고 상상하고 계산하며 나의 수를 발전시키는 게 진짜 AI 공부이다. AI로 바둑이 더 재미있어졌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롤 모델인 조훈현·이창호·이세돌 사범님들이 예전에 둔 기보(棋譜)를 복기하면서 장점을 배우며 그 분들이 가졌던 생각을 알고자 노력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바둑하면서 모든 패배나 좌절, 자만심 등 다양한 감정은 받아들이기에 따라 나중에 모두 도움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람이나 감정은 기어서라도 이겨내야 한다.”

◇세계 바둑계 ‘새로운 전설’ 가능성

신진서는 2020년 1월부터 이달까지 63개월 연속 한국 1위를 질주하고 있다. 그가 프로입단 후 거둔 통산 전적은 1070전 847승 220패(승률 79.4%), 야구로 치면 8할 타자 수준이다. 그는 최근 5년 2개월 동안 67억원 넘는 상금을 받았다.

평소 검약한 생활을 하면서 최근 6년간 1억원 이상을 쾌척해 ‘바둑계 기부왕’으로 불린다. 지난해에는 기력(棋力) 향상을 위해 거금을 들여 최고 사양의 AI 장비를 갖추었다.

연령상 최절정기에 접어든 신진서가 이창호 9단이 세운 기록들을 깨고 세계 바둑계의 ‘새로운 전설’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를 위해선 2000년을 전후해 출생한 한중일(韓中日) 기사 30~40명 가운데 그가 압도적인 1인자가 돼야 한다. 경쟁 대열에는 세계 랭킹 2위인 왕싱하오, 메이저 대회 7승을 거둔 커제, 2000년생 동갑내기인 딩하오·셰커, 양딩신, 투샤오위 등이 있다.

신진서 9단(사진 왼쪽)이 중국 항저우 치위안 체스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남자 단체전 결승에서 중국의 양딩신 선수와 대국하고 있다./뉴스1

◇대한민국에 희망 주는 ’2030′ 상징

신진서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전에는 나 보다 경험 많은 능구렁이 같은 중국 기사들을 상대하느라 힘이 부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도 들고 심리(心理)도 내가 앞서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 기사들과 승부할 때는 왠지 더 독해진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을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는 한국 기사가 드물어 ‘신진서 의존증’이 심해지는 것은 부담이다.

마지막 승부처는 결국 ‘마음가짐’이다. 양궁, 탁구처럼 장시간 멘탈을 유지해야 하는 바둑의 속성상 평정심과 ‘적수(敵手)들을 반드시 꺾겠다‘는 결기를 잃지 않는 게 관건이다.

세계 바둑 대전(大戰)에 사실상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출정하는 신진서 9단은 대한민국에 빛을 비추는 희망의 2030세대이다. 앞으로 그의 행보에 관심과 기대가 집중되고 있다.

신진서 9단(사진 왼쪽에서 네번째)을 필두로 한 한국 남자 바둑 대표팀이 중국 항저우 치위안 체스홀에서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남자 단체전에서 1위에 오른 뒤 시상식에서 함께 두 팔을 들어올리고 있다./뉴스1
세계 바둑 메이저 타이틀을 8회 획득한 신진서 9단의 눈은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그는 2025년 3월 13일 인터뷰에서 "한국인의 두뇌와 승부욕은 대단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엄청나게 몰두하고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면, 더 많은 세계 1등이 우리나라에서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송의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