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이 바라보이는 고즈넉한 서울 옥인동 골목. 흰 타일을 붙인 지하 1층, 지상 3층(대지 40평)짜리 아담한 건물이 두 달 전 들어섰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1층 입구 벽면에 정갈한 글꼴로 담긴 입주사들의 이름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 워크룸(디자인 스튜디오 겸 출판사), 슬기와 민(그래픽 디자이너), 더북소사이어티(미술·디자인 전문 서점), 양장점(서체 디자이너 양희재·장수영). 하나같이 국내 시각 예술·출판 분야에서 중요한 창작자들로 손꼽히는 팀들이다.
한 지붕 네 팀을 엮는 공통분모는 ‘글’. 글자를 디자인하고, 글을 만들고, 책을 읽고 파는 공간이 모여 있다. 출판으로 묶인 파주출판단지의 미니어처 버전을 연상시킨다.
건축주는 ‘워크룸’과 ‘슬기와 민’. 15년 가까이 알고 지낸 이들은 길 건너 창성동의 한 건물에서 아래 위층으로 세 들어 사무실을 운영했다. 두 팀은 “15년 이상 활동했는데 계약 기간이 끝나면 2년마다 다른 공간을 찾아 전전해야 하는 불안전성과 고정비용 부담을 벗어나고 싶어서” 뜻을 모았다. 새 건물엔 ‘유령 작업실’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들이 협업해 2013년 만든 출판 브랜드 ‘작업실 유령’을 도치한 것이다. ‘작업실’은 ‘워크룸(workroom)’, ‘유령’은 슬기와 민이 운영한 출판사 ‘스펙터(specter)’의 한글 뜻이다. ‘더북소사이어티’와 ‘양장점’은 이곳 세입자다.
김형진 워크룸 공동대표는 “‘의기투합’ ‘이웃사촌’ 등 감정이 개입된 단어가 안 어울리는 사람들이지만, 서로가 서로의 활동 조건인 존재였다”며 “10여 년 전 더북소사이어티가 시작할 땐 우리 같은 디자인 스튜디오가 ‘밑밥’ 까는 역할을 했고, 이후엔 더북소사이어티가 디자인 스튜디오들이 지치지 않도록 추동한 ‘심리적 보루’였다”고 설명했다. 오랜 시간 쌓아온 ‘느슨한 동료애’가 이 건물의 보이지 않는 주춧돌이란 얘기로 들렸다.
‘슬기와 민’ 최성민씨는 “근사한 카페를 들여야 부동산 가치가 올라가는 것 아니냐 농담하기도 하는데, 우리에겐 경제적인 수익보다 비슷한 결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말했다. 더북소사이어티 임경용 대표는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이곳으로 들어오는 게 자연스러웠다”며 “2000년대 중반부터 비슷한 방향과 태도로 책을 만들어 온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좀 든든하다”고 했다.
설계는 서촌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건축가 서승모씨가 맡았다. 2년 전 건축주가 요청한 것은 딱 하나. “2020년 서울에서 보이는 건물 같지 않았으면 좋겠다”였다. 노출 콘크리트, 커튼월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었다. 김형진 대표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한 번 더 보게 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시대착오’란 단어를 좋아한다. 건물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지금도 아니고 옛날도 아닌, 시대감이 묘한 건물”을 위해 건축가가 생각해낸 해법은 1970~1980년대 외장에 주로 쓰였던 흰 타일이었다. 여기에 커다란 통창 대신 분절한 창을 썼고, 계단은 을지로 옛 상가처럼 꺾임 없이 일직선으로 올라가도록 디자인했다.
“‘건물’이라는 단위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지금 이 순간 어떤 사람들이 나와 같은 건물에 있느냐는 것은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일을 하며 은근히 통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한 배에 탄 느낌. 오늘같이 비 오는 날이면 ‘노아의 방주’ 생각이 난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보며 최성민씨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