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오가와 요코 지음|김난주 옮김|티라미수더북|232쪽|1만4000원
두 발의 고독
토르비에른 에켈룬 지음|김병순 옮김|싱긋|288쪽|1만5000원
그럴수록 산책
도대체 글·그림|위즈덤하우스|208쪽|1만3800원
“어느 틈엔가 ‘언짢음’은 조그만 자갈돌만 하게 뭉쳐졌다. 두서없었던 것이 손바닥에 쥐어질 만큼 조그맣게 응축된 것이다. 걷는 리듬에 맞춰 데굴, 데굴, 가슴뼈 사이에 굴러다닌다.”
이 구절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면 걷기의 효용을 제법 아는 사람일 터다.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2003년 요미우리문학상과 일본서점대상 등을 받은 오가와 요코는 첫 산문집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에서 찬탄할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한탄할 만큼 버거운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작은 장치로 ‘산책’을 꼽는다.
출장길에 언짢은 일을 겪은 밤, 오가와는 호텔 앞 공원을 걷기 시작한다. 취객이 앞을 가로막고 수풀 속에서 벌레가 휙 튀어나온다. 머리를 비우려 나왔는데 오히려 신경만 곤두서 마음 놓을 겨를이 없다. 그러다 땀이 배어나올 즈음, ‘언짢음’의 형태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한 걸음 흙을 밟을 때마다 몸속에서 발생한 작은 진동이 잔물결처럼 퍼져 가슴을 채운다. 그리고 ‘언짢음’의 원천에 도달한다. 비안개처럼 답답하게 끼어있던 그것의 윤곽이 확실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체에 거른 것처럼 투둑투둑 가슴속으로 가라앉는다. 호텔 방으로 돌아와 양말을 벗자 왼쪽 발 엄지에 물집이 잡혀있다. “오오, 나의 고뇌가 이렇듯 조그만 돌멩이로 정리되었구나.”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엄지발가락을 비누거품으로 마사지해준 그날 밤은 곤히 잠들었다.
“소설을 쓰다가 피곤해질 때, 기분 나쁜 일이 있었을 때, ‘아, 그래. 산책을 하면 되지’ 하고 중얼거리고는 선크림을 바르고 집을 나선다”는 오가와가 ‘걷는다’는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다. 주인공 ‘나’와 나오코는 1년 만에 우연히 재회해 도쿄 요쓰야역에서 고마고메까지 7.3㎞를 걷는다. 데이트라 할 수 있을 만큼 낭만적인 산책은 아니다. 목적도 없이, 거의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채, 나오코는 하염없이 걷고 ‘나’는 그런 그녀 뒤에서 1m 정도 거리를 두고 그저 묵묵히 따라 걷는다. 오가와는 ‘노르웨이의 숲’과 등장인물들이 늘 거리를 걸어다니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등을 ‘산책문학’이라 명명한다. “산책할 때, 몸은 당연히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는 있는데 기분도 같이 따라가고 있는지 의문이 남곤 한다. 오히려 기분은 한 점에 머물러 몸이 지나치는 흔적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몸과 기분은 맞춤한 속도로 분리되고, 웅성거리는 마음속 어둠에도 시선이 닿는다.”
오가와의 책이 산책에 대한 소회를 예리하고 위트 있는 문장으로 낚아챈다면 노르웨이 저널리스트 토르비에르 에켈룬이 쓴 ‘두 발의 고독’은 ‘걷기’에 대한 묵직한 명상이다. 뇌전증 진단을 받고 더 이상 운전을 못하게 된 저자는 모든 길을 걸어 이동하기 시작한다. 일주일에 평균 50~60㎞씩을 걸으며 깨닫는다. “그냥 걷기 위해 걷는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다” “걷기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언제는 한 발이 땅을 밟고 있는 상태다”…. 저자는 얼마나 느리게 이동할 수 있는지를 숙고한다. ‘길’이라는 것이 어떤 한 사람이 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이들이 걸어 다닌 행동이 모두 모여 만들어진 것’이라 깨닫기도 한다.
걷기 좋은 계절이 절정에 이르렀다. 창밖 신록에 마음을 뺏겨 글밥 많은 책을 잡고 있을 여유가 없는 독자들에겐 도대체 작가의 그림 에세이 ‘그럴수록 산책’을 권한다. 산책길서 건져올린 깨달음을 그렸다. 꽃이 피었을 땐 모든 나무가 존재감을 뽐냈지만 모두 초록으로 바뀐 지금 언뜻 봐서 구별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열매를 만들고 있다. 일찌감치 열매를 내놓는 나무들이 있는 반면, 이제부터 시작인 나무들도 있다. 아무도 초조해하지 않고 각자 다른 빠르기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