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차디찬 바람을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느낄 때쯤이면, 봄이 살포시 곁에 와 있다. 다시 봄이다. 계절의 순환이 반갑다. ‘지금 문학은’ 특집으로 봄을 다룬 소설 두 편과 시집 한 편을 추렸다. 작가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봄을 쓴다. 봄은 언제고 늘 돌아오지만, 봄을 느끼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불확실한 봄의 친구들
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장편소설 | 320쪽 | 열린책들 | 1만6800원
미국 소설가 시그리드 누네즈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다. 사랑과 우정, 문학과 예술을 둘러싼 이야기를 독특한 유머 감각으로 우아하게 풀어내는 작가다. 2018년 장편소설 ‘친구’로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2020년 작 ‘어떻게 지내요’는 지난해 베네치아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룸 넥스트 도어’의 원작이다.
‘그해 봄의 불확실성’(원제 The Vulnerabes)은 그의 아홉 번째 소설. 여기서 ‘그해 봄’은 2020년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해 사회적 혼란이 막 시작된 뉴욕 맨해튼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은 우리에게 주어졌던 일상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이었는지 돌아본다.
화자인 ‘나’는 뉴욕을 떠난 친구네 집에서 앵무새 ‘유레카’를 돌보는 것으로 간신히 일상의 갈피를 잡는다. 그러던 중 대학생 ‘베치’가 난입한다. 도무지 친해지기 어려울 것 같던 두 사람이 ‘캐러멜 오트 밀크 아이스크림’을 계기로 서로에게 스민다. 봉쇄령이 내린 유령 같은 도시에서 노년의 소설가와 대학생, 앵무새가 쌓는 독특한 유대와 친밀감을 그린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와중에도 인간적 유대감은 위안을 준다.
◇마음이 녹는 봄
봄이 오면 녹는
성혜령·이서수·전하영 소설 | 216쪽 | 다람 | 1만5000원
‘봄이 오면 녹는’은 다람 출판사가 처음 선보인 ‘얽힘’ 앤솔로지의 첫 번째 편이다. 세 작가가 독립적인 단편소설을 쓰면서도, 서로 세계관과 소재를 공유하는 일종의 프로젝트형 소설 쓰기다. 첫 타자로 소설가 성혜령·이서수·전하영이 각각 단편을 썼다. 서울 북촌의 정독도서관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한 소설에 나온 인물이 다른 소설에 또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봄이라고 마냥 말랑하고 따듯한 소설을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공통 주제는 ‘손절’. 꽁꽁 얼었던 마음이 녹았을 때, 무엇이 그 자리에 있을까. 오히려 추악한 것이 떡 하니 버티고 있을 수도 있는 법이다.
특히 성혜령의 ‘나방파리’는 일찌감치 연을 끊었어야 할 두 사람의 지독한 얽힘을 그리는데, 소설 말미 이들의 ‘손절’은 홀가분하면서도 마음에 알 수 없는 아픔을 남긴다. 작가의 표현대로 ‘무심코 눌러 죽인 나방파리 같은 검은 얼룩’ 같은 ‘거뭇한 잔상’이 남는다. 이서수의 ‘언 강 위의 우리’나 전하영의 ‘시간여행자’ 등 단편도 흔히 생각하는 봄의 따스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세 편의 소설 모두 얼어붙은 마음이 녹는 순간을 절묘하게 그린다.
◇詩, 봄날의 자랑
시 읽는 일이 봄날의 자랑이 될 때까지
김해자 외 시집 | 192쪽 | 걷는사람 | 1만2000원
연노랑 표지가 싱그럽다. 볕이 좋은 봄날에 펼쳐 들고 싶다. ‘시 읽는 일이 봄날의 자랑이 될 때까지’는 ‘걷는사람 시인선’ 시리즈가 7년 만에 낸 100호 기념 시집이다. 1~99호까지 함께한 시인들의 시집에서 대표작 1편씩 엄선해 실었다. 문학과지성사·문학동네·창비 등 익숙한 시인선과 다른 느낌이 든다.
시집의 제목은 시인 문신의 시집 ‘죄를 짓고 싶은 저녁’에 실린 시 ‘시 읽는 눈이 별빛처럼 빛나기를’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해뜨지 않는 날이 백 일간 지속된다면 나는 캄캄한 살구나무 아래 누워 시를 읽을 것이다 비가 오면 심장까지 축축하게 젖도록 시를 읽을 것이다 (중략). 시 읽는 일이 봄날의 자랑이 될 때까지 나는 캄캄한 살구나무 아래에 누워 시를 읽을 것이다.’
이 밖에도 봄기운이 흩날리는 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바래다 줄게, 꽃 피는 근처까지// 막 햇빛이 다녀간 벤치에 앉아/ 지루한 발밑에서 절걱거리는/ 돌멩이 소리를 듣곤 했지/ 문득 새들이 날아들었다 흩어지고’(박진이 ‘바래다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