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중독
조시 코언 지음|노승영 옮김|웅진지식하우스|380쪽|1만8500원
유능한 토목 회사 감독 빅터가 자신의 부하 직원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오래된 석조 다리를 조사하러 간 직원이 균열을 미처 못 봤기 때문. ‘착하게 사는 건 포기했어도 옳을 순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빅터에게 상담가인 저자는 말한다. “사람과 장소를 연결하는 구조물에 평생을 바쳤으면서, 정작 스스로는 (사람과) 연결을 거부하고 접근 불가능하게 만들었군요.”
이 이야기를 듣고 당신에게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우리 모두는 성난 자아가 빼곡히 들어찬 ‘분노 중독’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을 보면 더욱 그렇다.
매일 상담실에서 “분노의 도가니”를 목격한다는 저자가 이런 분노의 파도에 올라타는 대신, 분노에 대해 함께 숙고할 것을 촉구하며 쓴 책이다. 영국 골드스미스런던대 교수이자, 영국정신분석학회 펠로인 저자는 국내에도 ‘HOW TO READ 프로이트’ 같은 책으로 알려졌다. 주로 분노하는 사람이 일으킨 현상에 초점을 맞춘 기존 논의와 달리,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깊게 파고들었단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저자는 분노도 저마다 성격이 다르다고 진단한다. 먼저 빅터처럼 철저한 확신에서 오는 분열적이고 편집증적인 분노가 있다. 자신만 옳으며, 자신에게 진실을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자주 보이는 ‘의로운 분노’다. ‘의로운 분노’는 자신이 가장 옳게 느껴지는 그 순간 가장 위험하다. 자기 확신에 단단히 틀어박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분노와 옳음이 견고하게 융합되는 순간 공포 정치를 낳고, 자칫하면 혁명적 숙청과 탄압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직장에선 ‘의로운 분노’보단 ‘실패한 분노’를 만날 확률이 더 높다. 대부분 사람은 공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특히 분노를 비롯한 부정적 감정을 자제해야 한단 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분노는 우회됐을 뿐, 사라지진 않는다. ‘변장된 짜증’이나 ‘수동적 공격’과 같은 훨씬 은밀하고도 교묘한 형태로 새롭게 나타난다. 이때 분노는 계속해서 표출되고 있는데도, 겉으로 뚜렷하게 감지되진 않는다. 그래서 상대가 문제를 제기했을 때, 언제든 “내가 원래 그래” “화낸 것처럼 느꼈다면 미안”과 같은 식으로 둔갑할 수 있다. 분노와 공격을 표출하면서 그에 따르는 위험을 겪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억압된 분노는 정서적·정치적 조종과 악용에도 취약하다. 2021년 1월 미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이를 ‘냉소적 분노’라고 말한다. 해결하지 못한 분노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바깥 세상에서 자신이 분노하는 원인을 찾고자 한다. 이들은 “세상 다 망해버려라”와 같은 구호에서 위안을 얻거나, 극단주의자가 지목하는 외부의 적을 향해 무자비한 폭력을 분출한다.
재밌는 사실은 극단주의자는 자신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유지하고 심화하기 위해 음모론을 쓰지만, 이를 제기하기만 할 뿐 결코 해결하려고 들진 않는다는 것. 그래야 대중이 영원히 해소되지 않는 분노 상태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하나. 아쉽게도 저자는 ‘숫자 10부터 1까지 세기’ ‘명상하기’ 등 분노를 없앨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해법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분노를 잘 느끼는 게 우선’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잘 느낀다는 건 분노 뒤에 숨은 미지의 불안과 욕망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겨우 그 정도로 뭐가 달라질까’ 싶지만, 저자는 이를 ‘상대방을 모욕하는 것과 당신이 상대방에 의해 상처받고 분노를 느끼는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분노를 생각과 말과 이미지로 표현할 방법을 찾을 때, 이는 예술적 창조의 원동력이자 자아 및 관계의 균열을 보수하는 ‘유용한 분노’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서두의 빅터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빅터가 저자의 상담실을 찾은 건 자신의 딸이 아빠를 얼마나 미워하고, 심지어 역겨워하는지 들으면서다. 딸의 고백은 그의 ‘옳음’에 작은 균열을 내며 자신의 분노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시작도 여기서부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