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퍼큐비클
백가경 시집| 228쪽 | 문학과지성사 | 1만2000원
백가경의 첫 시집 ‘하이퍼큐비클’은 동시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실험적 상상력이 결합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언어적 폭주를 구현하고 있다. 시집을 펼친 독자라면 우선 과잉되고 도발적인 언어들의 분열적 범람에 놀라게 될 것이고, 무한히 증식·번식·번성해 나가는 이상한 시공간 속에서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면 대단히 난해해 보이는 이 시집이 사실상 전면화하는 상황은 의외로 명징할지도 모른다. ‘비행기 안에서 기장이 좋은 소식 한 가지와 나쁜 소식 한 가지를 방송한다/ 나쁜 소식은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우리가 곧 낙하한다는 것/ 좋은 소식은 바닥없는 세계에 진입했다는 것’(‘임시 정원’)
이처럼 영원한 추락이 예고된 ‘하이퍼큐비클’의 세계가 알레고리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끝없는 노동, 쉴 틈 없는 자기 계발, 한계 없는 자본의 확장 속에서 착취되고, 파괴되고, 갈려나가는 인간의 영혼이다. ‘우린 갈려 질이 안 좋을수록 먼저 갈려/ 갈리지 일정한 부피와 무게로/ 가벼운 더미가 된다’(‘호텔 엑셀시오르’)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가속화하는 무한 증식과 분열의 세계에서 시인은 이렇게 반문한다. ‘솔직히 말해봐요 사실 출구 없죠?’(‘1460은 걷고 있다’).
백가경은 이처럼 출구 없는 세계에 갇힌 인간의 실존적 현실을 급진적으로 형상화한다. ‘벌레의 노고를 높이 산 나는/ 그를 인간이라 부르기로 한다’(‘아이디어 라이더’) 인간과 벌레가 무차별해지는 안티 휴머니즘적 시공간 속에서, 시인은 인간을 초과하는 낯설고도 새로운 비인간의 노래를 시도하는 중이다. 미래의 시를 예감케 하는 징후들이 도처에서 폭발하는 ‘하이퍼큐비클’은 동시대의 가장 첨예한 시적 실험의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