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광고를 전혀 하지 않는다. 작가 인터뷰 역시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책이 출간된 건 무려 23년 전. 그런데도 2021년 3월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린 소설이 있다. 조용한 기록의 주인공은 소설가 양귀자(66)의 장편 ‘모순’. 16일 소설 부문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22위, 온라인 서점 예스24 38위, 알라딘 64위에 올라 있다. 1998년 출간한 작품이 23년이 지나서도 작품 자체의 힘만으로 독자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교보문고 소설 베스트셀러 30위권 안에서 출간한 지 20년이 지난 한국 소설은 조세희 소설가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8)과 ‘모순’뿐이다.

1999년 서울 종로구 구기동 집필실의 소설가 양귀자. 그는 20년간 광고나 인터뷰 없이 작품으로만 독자와 만나고 있다. /조선일보 DB

모순은 25세 미혼 여성 ‘안진진’이 화자다. 시장 행상 어머니와 망나니 아버지, 깡패 남동생을 증오하면서도 애정을 느끼는 딸의 모순, 성격이 다른 두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다 미래의 안정을 이유로 원치 않는 남자를 결혼 상대로 선택하는 여성의 모순이 그 안에 있다. 살림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돼 그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뒤 15년간 132쇄 100만부가 넘게 팔렸고, 2013년에 쓰다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나온 뒤에도 꾸준하다. 쓰다 출판사 측은 “개정판은 특별한 마케팅 없이 현재까지 31쇄를 찍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따르면 2014년부터 ‘모순' 판매량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서점 측은 “2020년에도 전년 대비 2배 넘게 늘었고, 올해도 지난해 동기 대비 61% 늘어난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했다. 명실상부한 스테디셀러. 출판업계는 ‘모순'의 지난해 판매량을 5만권가량으로 추정하고 있다. 매스컴에도 등장하지 않고 광고도 없었던 20년 전 소설이 이렇게 팔리는 경우는 전례를 찾기 힘들다.

양귀자는 ‘원미동 사람들’(1987),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2) 등을 발표하며 199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소설가로 활동했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전면에 나선 적이 없다. 작가는 평소 후배들에게 “작품 광고나 인터뷰를 하지 마라, 작품을 서점 매대에 놔두면 언젠가는 독자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숨어있는 작가에게 어떻게 이런 대대적 호응이 가능했을까.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계기는 페미니즘. 2016년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도 있었지만, 여성의 삶을 다룬 작품들이 시대의 요구에 맞춰 소환됐다. 김효선 알라딘 한국소설 MD는 “양귀자는 각종 소셜미디어에서 여성주의 작가로 회자되며 젊은 여성 독자들의 입소문을 탔다”고 말했다. 양귀자 독자의 77%가 20·30세대 여성이었다.

하지만 궁금증은 또 남는다. 수많은 1990년대 여성 소설가 중에 왜 양귀자였을까. 김미현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모순은 제목 그 자체로 모순투성이인 여성의 삶을 드러낸다”며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여성의 현실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공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귀자는 또 술술 읽히는 작품을 쓰는 작가로 이름이 높았다. 1990년대에는 통속 문학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대를 관통하는 문제의식과 이야기 중심의 서사가 지금 독자들과 만났다는 평가가 많다. 1998년 ‘양귀자론’으로 등단한 문학평론가 류철균씨는 “양귀자의 문장은 알기 쉬운 묘사로 젊은 여성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포착한다”며 “우회적인 장치 없이 젊은 화자의 목소리를 빌어 여성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에 독자들의 마음을 울린 것 같다”고 말했다.

작가와의 인터뷰를 위해 여러 번 연락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고사했다. “너무 오래된 소설이라 따로 말할 게 없다. 양해해달라”는 게 대답이었다.

양귀자 장편소설 ‘모순’

조용한 기록의 주인공은 소설가 양귀자(66)의 장편 ‘모순’. 16일 소설 부문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22위, 온라인 서점 예스24 38위, 알라딘 64위에 올라 있다.

―1998년 첫 출간, 2013년 개정판 출간

―최근 20년간 책 광고, 작가 인터뷰 없음

―지금까지 총 163쇄(개정판 31쇄 포함)

―작년 판매량 5만부 추정(한 달 평균 약 4100부)

※작년 최다 판매 페미니즘 소설, 정세랑 ‘시선으로부터’(총 10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