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52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김인환·오정희·정과리·구효서·이승우·김인숙)는 최근 비대면 독회를 열고 지난 3월에 출간된 소설 작품들을 검토했습니다. 5월 독회의 추천작은 모두 2권. ‘우주보다 낯설고 먼’(김연경), ‘환한 숨’(조해진)입니다.
다음은 2021년 동인문학상 5월 독회 심사평 전문.
◇김인환·문학평론가
◊ 조해진 ‘환한 숨’
조해진의 소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제로 상태로”(63쪽) 남아 있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쓸쓸하고 허전한 사랑 이야기이다. 어두운 이야기에 『환한 숨』을 불어 넣는 것은 문장의 힘이다. 조해진의 문장은 느낌의 표면에 밀착하여 관념으로 비상하지도 않고 절망으로 침잠하지도 않으면서 아주 느린 호흡으로 우리 시대의 위태로운 일상을 미세하게 묘사한다. 문장의 힘은 단편의 통일성에는 하나의 서술관점이 필요하다는 소설의 관행조차 뛰어넘는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봤다. 그때 그녀가 본 건 내가 아니라 나를 통과한 상상의 아들이었을 것이다”란 1인칭 서술과 “무슨 애를 말하는 거냐고 그녀가 되묻자 아버지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렸다”란 인물시각 서술이 소설의 한 페이지(238쪽)에 연속되어 있고 과거 시제로 계속되는 문장 속에 “이제는 적어도 짐작할 수는 있다. 병석에 혼자 남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 시선의 끝에 있었다는 것을”(248쪽)이라는 미래완료 시제가 개입된다. 그런데도 소설의 어조와 인상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도대체가 영원한 것이 없는 관계에 대한 환멸, 매 순간 사람을 녹슬게 하는 긴 기다림과 역시나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생의 한계”(282쪽)를 견디게 하는 것이 바로 문장에 대한 조해진의 믿음이다. 모두가 성장과 발전을 구가하는 시대에도 노동의 현장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온도계 회사에서 다섯 명의 소년이 수은 중독으로 죽어갔고 현재에는 공장일에 우체국과 은행, 약국과 편의점 잔심부름까지 하던 열여덟 살의 소녀가 지친 몸으로 사출기 작동을 점검하다 3층 난간에서 떨어져 죽어간다. 계약이 만료된 대학 강사는 마트 일이나 청소용역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고 재계약을 받지 못한 기간제 교사는 공장에서 다친 학생을 계속해서 도와줄 수도 없게 되며 기금을 받아 먼저 인건비를 지급하고 영화를 만들던 청년이 빚 갚는 데 5년의 세월을 보낸 후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처남이 장모의 유산을 혼자 받았나 의심하는 남자가 된다. 호주에서 하루 열 시간씩 일해서 번 돈 천만 원으로 1년 동안 준비하여 신문사에 들어갔는데, 그것이 파업하는 기자들을 해고한 자리였다. 정권이 바뀌어 기자들의 복직이 가능하게 되자 새로 들어온 기자들의 처지가 곤란하게 되었다. 연진은 마음속으로 혼자 좋아하는 학교 선배 윤희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다. 연진은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윤희 선배의 문장을 읽었다. 선배의 문장은 낡은 학보사 책상을 비추는 햇빛처럼 연진의 주위를 밝혀주었었다. 간사를 맡아 파업을 주도하던 윤희는 해고되지 않았지만 스스로 사표를 냈다. 다른 선배의 인스타그램에서 윤희가 종종 인천 공항에 가 앉아 있다 온다는 것을 전해 듣고 연진은 공항으로 가서 마침 걸어 나오는 윤희를 만나 무작정 온몸으로 다가갔다.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던 공항의 한가한 출국장에서 연진은 그렇게 삶의 한 절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날에 대해서라면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투 선 채 연진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윤희의 섬세하게 주름진 얼굴이 지금도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것을, 그러나 연진은 지난 3년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134쪽). 그와 함께 같은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하는 길동무가 있는 사람은 할 일과 갈 길을 찾을 수 있다. 나의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길벗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위기와 동요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영문도 모른 채 몰려다니며 학살하고 학살당하던 1950년의 전쟁 이후 뻔뻔하게 살아남아 버텨온 한국인의 삶은 “이 세상이 오물 위에 세워진, 부서지기 쉬운 구조물이라는 환멸”(198쪽)로 이어질 뿐이었다. 고통스럽기만 한 환멸을 전경에 내놓고 보여주는 이 소설집의 배경에는 우리 시대에 가능한 최소의 그러나 완강한 사랑과 희망이 흐르고 있다.
◊ 김연경 ‘우주보다 낯설고 먼’
김연경의 『우주보다 낯설고 먼』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가족사 소설이다. 연수가 태어나서 대학에 입학하는 1975년부터 1995년까지 그녀 가족들의 개인사를 집힙적으로 기록한 이 소설의 주도소와 추동력은 70년대 이전에 출생한 한국 사람이 한결같이 겪은 빈궁이라는 사실의 힘이다. 모두가 하루하루를 아슬아슬하게 힘겹게 견디면서 살아남았다. 일정한 수입이 없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은 이제 와서 돌아보면 산업화나 민주화보다 더 큰 기적이다. 이 소설이 주인공은 연수의 어머니 유숙이다. 소설은 유숙으로 시작하여 유숙으로 끝난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농사일과 집안일을 돌보던 유숙은 가출하여 서울로 올라가 공장을 전전하다 버스 차장을 끝으로 객지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국졸 출신 농사꾼 김준호에게 시집가서 일남이녀를 낳는다. 소설에서 큰집과 큰큰집이라고 부르는 친형과 이복형이 보두 부산에서 자리를 잡고 잘 사는 것을 보고 준호도 거창의 가산을 정리하여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전지 화자의 구성진 입담이 각 인물들의 시각을 그대로 또는 약간 뒤틀어 보여주는가 하면 때로는 연희의 시각을 연수의 시선을 통하여 보여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어린 연수의 시각을 마흔이 넘은 어른 연수의 시선으로 확대하여 보여주기도 한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전지 화자와 반영 화자의 시선이 겹쳐져서 빚어내는 복합적 서술에 있다. 어린 연수의 시선에 포착된 거창 다람재의 풍경은 시적인 정취를 소설 전체로 발산하고 있다. 연수의 집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사글세에서 전세로 발전하듯이 김준호의 직업도 날품에서 행상을 거쳐 과일가게 주인으로 발전하고 연수가 읽는 책도 동화에서 『좁은 문』을 거쳐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로 발전한다. 가난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던 유년 시절과 돈 못 벌고 당당하지 못한 아버지를 내심으로 무시하던 중학 시절과 자식들에게 책 한 권이라도 직접 사주고 싶어 하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고등학교 시절에 각각 연수가 보여주는 감정의 추이는 이 소설의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쥐와 서캐와 쥐며느리와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환경에서 연수는 이웃집 영준 오빠에게 들은 『죄와 벌』을 오래 기억하며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한다. 화장실에서도 책을 놓지 않는 공부 벌레의 서울대학교 합격으로 끝나는 이 소설의 희극적 구성은 서술자의 해학적 어조에 의해 강화된다. 가난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의 바탕에는 세계와의 화해가 흐르고 있다. “살아서 네 밥을 먹었으니 죽어서도 네 밥을 먹을란다”라고 말한 시아버지를 기억하며 유숙은 무슨 일이 생기든지 “아버님 도와 주이소”를 염불처럼 뇌이다가 겨우 셈이 조금 펴자 큰집에 가서 시아버지 제사를 받아온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묶어주는 이 연대의 핵심이 바로 지옥 같은 가난을 버티고 이겨내게 한 세계와의 화해이다. 루카치는 아이러니에 근거하는 본격소설과 유머에 근거하는 통속소설을 비교하였고 키르케고르는 반대로 아이러니에 근거한 지식과 유머에 근거한 신앙을 비교하였다. 소설의 구성에는 y가 x에게 추방된다는 파국적 구성과 x가 y를 비판한다는 풍자적 구성과 x와 y가 대립한다는 반어적 구성과 x와 y가 화해한다는 해학적 구성이 있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풍요가 아니라 화해이다. 화해는 서로 자신과 상대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관용에서 시작된다. 불화 속의 풍요가 당연한 일이 된 시대에 화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오정희·소설가
◊ 조해진 ‘환한 숨’
9편의 단편을 모은 이 책의 목차에서 이 책의 제호인 ‘환한- 숨’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제목을 달리하는 각각의 소설들은 대체로 막다른 곳까지 밀린 약자들의 생존을 위한 숨쉬기, 자존과 자유를 향한 ‘환한- 숨’쉬기를 꿈꾸는 이야기로 읽힌다. 작가는 사랑과 죽음, 생의 피로와 환멸, 산업현장의 희생자, 조직과 개인의 문제 등등 우리가 현실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불화의 양상과 본질 들을 촘촘한 그물을 낮게 드리워 두루 훑으며 그것의 문학적 형상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네가 들이키고 있는 숨이 나의 숨과 뒤섞이고 있다’는, 생명가진 것들끼리의 연대감, 그 누구도 무엇도 우리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는 인식, 살아내야 하는 존재들의 그 고통과 슬픔에의 연대의식과 공감이 이 작가의 문학의 출발점이자 지향점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개인의 내면에 갇히지 않고 세상을 끌어안으며 발언해야 한다는 작가로서의 윤리의식, 소명감, 단호한 문학관일 수도 있겠다.
결벽에 가까운 엄중한 자기검열이 때로 읽는이를 불편하게 자극하기도 한다. .
내면의 실존적 불안과 물음은 한 존재가 부닥치고 감당해나가야 하는 사회적 현실과 끊임없이 삼투작용을 하며 독자들을 끌어들이면서 독자에게도 그만한 밀도의 긴장과 섬세함을 요구한다.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정도로 세분화한 감정과 사유의 섬세한 결들을 따라가기가 벅차기도 하지만 제도와 구조 속에서, 민감성과 내향성으로 인해 태생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숱한 인물들을 향한 깊고 섬세하고 곡진한 작가의 시선에, 낮고 가만한 작가의 목소리에 속절없이 끌려들 수밖에 없다.
◊ 김연경 ‘우주보다 낯설고 먼’
성장소설로서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근 반세기에 이르는 세월과 경상남도 거창 지리산 골짜기 마을에서부터 부산, 서울에 이르는 공간들을 한권의 소설로 착실히 담아냈다. 소설 속 화자의 조부모와 부모와 그 자녀들 3대가 살아온, 살아가는 이야기는 바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들의 생활사이자 사회변천사, 한국의 현대사이기도 하다. 흔히 소설에서의 한 방식, 사회적 격변이나 비극적 역사들이 개인의 삶을 결정짓고 전복시킨다는 문제적 상황을 원경으로, 간접동인으로 장치하고 전면에는 삶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내세워 진행시켜가는 탓에 담백하고 정직한 풍속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래서 예상과는 다른 방식의 기술, 특별날 것 없이 태어난 그대로의 조건을 수락하며 그만그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진솔하고 신선하다. 어느 누구나 그때는 그랬지 하고 미소로 고개를 끄덕일 법한 친근하고 정답고 생생한 소설이다. 어떤 세월에서도 어른들은 세상살이의 습과 결로 주름지며 늙어가고 아이들은 나름의 성장통을 겪으며 자라기 마련이다. 성장이란 얼마나 고독하고 지난한 과업인가, 또한 얼마나 놀랍고 근사한 일인가. 어제와 오늘, 이곳과 저곳, 너와 나 사이의, 그리고 시공간의 놀라운 단절을 느낄 때, 그 성장의 비밀한 순간을 포착하는 작가의 눈이 날렵하고 민감하다.
작가들은 끊임없이 가족사에의 유혹을 느끼고 언젠가 한번은 반드시 쓰게 되어 있다고들 한다. 자신의 뿌리, 원천, 존재의 비밀이기도 하기에 가족사에 따른 성장기록은 작가로서는 반드시 짚고 가야 할 과제, 건너가야 할 징검다리인 것일까.
이제껏 많은 소설들을 써오며 자신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온 이 작가의 성장소설은 어쩌면 새로운 세계에의 진입을 위한 들메끈 고쳐매기거나 자기점검이거나 모종의 통과의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과리·문학평론가
◊ 김연경의 『우주보다 낯설고 먼』(장편)
예전에 “밑구녘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있었다. 한국인의 상당수가 그런 가난의 늪을 탈출하여 물질적인 안정을 누리고자 필사적으로 몸부림한 게 지난 세기 후반부이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1인당 국민소득이 100불을 겨우 넘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3만불을 웃도는 살림을 구가하고 있다.
무수한 사연이 그 과정 속에 쌓이고 쌓였으리라. 김연경의 자전소설 『우주보다 낯설고 먼』은 바로 이 한반도판 입지전의 가장 전형적인 양상을 생짜로 양각하고 있다. “우주보다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그래봤자 겨우 40년 전인데도 불구하고, 그 시간대에서부터 오늘날까지, 한 가족이 산골을 탈출해 가게 사장님이 되고야 마는 그 ‘주구장창(주야장천)’의 달음박질을 생중계함으로써.
그렇다 해도 이 소설은 자서전이 아니라 소설이다. 그렇다는 것은 여기에 증언의 활력과 뿌듯한 성취감이 있는 게 아니라, 살아온 삶에 대한 투명한 반성과 그에 근거한 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처음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차츰 자긍심을 느끼기보다는 무언가 꺼림한 감정들의 복병들을 만나게 되고, 그것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꼼꼼히 붓질을 하는 작업을 통해, 독자를 한국적 돌파담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깨달음으로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그 깨달음의 요목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가난’은 벗어나야 할 지옥이라고 말해지지만 실상 사는 기운의 원동력이라는 사실. 그들은 처음부터 가난했고 사정이 나아져도 가난했다. 삶에서의 모든 사건들은 가난으로 집중된다. 이런 진술처럼.
“벌을 다 받으면 쏜살같이 밖으로 내뺐다. 형우는 슬슬 깨달아갔다. 모든 것이 이 방처럼 뭔가 어그러지고 찌그러졌다. 모두 가난 탓이라는 생각도 꿈틀거렸다.”(p.307)
한국인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기를 쓰고 일했다기보다, 가난을 먹고 살았다. 그것은 그들이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富)에 눈이 떴기 때문에 이 탈출극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풍요에 꽂힌 시선이 끊임없이 더 큰 풍요를 향해 달려가려면 계속 가난을 되새김해야 한다.
둘째, 이 가난과 풍요는 통상 원시와 문명으로 번역된다는 사실. 가난한 자는 미개한 자이고 부자는 문명인이다. 그래서 방향이 저절로 주어진다. 무조건 문명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곧 죽어도 다시 고제 골짜기로 들어가기는 싫”(p.60)은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삶은 현재 주어진 환경에 노상 불평하면서도 그 환경의 정점에 놓인 삶의 상태를 전폭적으로 따른다. 요즘 예능프로에서 유행하는 말로, ‘무조건 긍정’이 이들 삶의 바른 자세이다.
셋째.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먼저 앞서 나간 사람들, 즉 먼저 부를 차지한 사람들의 ‘꼬붕’이 되거나, 똘마니가 된다는 것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제 그들은 앞서 나간 사람들을 따르면서 경쟁자로 변신한다. 왜? 목표는 그들에게 똑같으니까.
광속이 불변이듯이 꿈의 목표는 모두에게 똑같다.
“그래, 너거 엄마가 처녀 때 얼마나 멋쟁이였는지 아나? 머리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엉덩이에 딱 달라붙는 미니스커트 입고…… 지금은 저래 노점상이나 하고 있지만.”(139)
넷째. 그러니까 도찐개찐이다. 미리 부를 축적한 사람은 엄청 앞서 나간 것 같지만, 그 밑절미는 뒤쫓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다. 다를 바 없다. 원시인과 문명인은 그렇게 뒤섞인다. 원시인과 문명인을 대비시키는 이 묘사를 보라.
“(1) 다음 날 오후가 되자 큰엄마가 왔다. 짧고 윤이 나는 단발 머리에 화장이 화려하지는 않되 어딘가 정돈된 얼굴, 무릎이 보이는 치마에 새카만 롱부츠를 신고 있었다. 엄마와 동갑임에도 완전히 딴 세상 사람이라는 건 금방 보였다.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나온 교수와 거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한 까막눈 아줌마. 이건 거의 사람과 동물의 차이라고 연수는 생각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큰엄마의 눈에는 정은이만 보이는 것 같았다. (2) 다소 늦은 점심을 먹는 내내 정은이 옆에 붙어 앉아 밥을 떠먹이고, 명절이 아니면 구경할 수도 없는 조기의 살을 일일이 발라내 입안에 넣어주었다. 연수의 눈에는 무척 낯선 풍경이었다. 엄마가 없을 때는 친구들도 그냥 보낼 만큼 연수를 좋아하던 정은이도 아이다운 직설 화법으로 사촌을 내쫓았다. / “우리 엄마 왔으니까 언니 니 이제 그만 가라.”(pp.94-95)
(1)은 두 사람의 차이를 힘주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2)로 넘어간다. 무심코 따라가던 독자는 (2)에 와서 무언가 걸리적거리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자니, 대학교수인 큰 엄마나 농투성이 엄마나 자식만 챙기는 건 똑같다. 거의 짐승스럽다. 그리고 그 부모에 그 아이다.
이렇게 문명은 원시를 노출하고 원시는 문명이 될 자격을 얻는다. 원시와 문명은 그렇게 뱅뱅 돈다. 그리고 결국은?
마지막으로, 그러니까 아무리 문명인으로 거듭난다 할지라도, 겨우 오십보 더 나아갔을 뿐이다. 주인공 ‘연수’의 대학교 합격 여부를 미리 알고자 엄마 ‘유숙’이 이곳저곳으로 점치러 다닌다. 복채만 탐내는 점쟁이들에게 화를 내다가 마침내 진짜 점장이를 만난다. 그가 진짜인 것은 다음 점괘풀이가 그대로 증명한다.
“자네, 늦복이 보통이 아니구먼. 늘그막에는 아들딸이 주는 돈 갖고 떵떵거리며 살겠어.”(p.304)
소설은 곧바로 마감함으로써 ‘연수’가 정말 합격했는지 여부는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빤히 안다. 연수가 당연히 합격하리라는 것을. 그의 장래가 활짝 열리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렇다고 정말 ‘유숙’이 “떵떵거리며 살”게 될까?
이 또한 아니라는 것을 독자는 안다. 소설 속 ‘연수’의 실물인 작가 ‘김연경’은 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딴 지식인이지만 가난한 소설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진짜 버는 놈은 따로 있다는 것. 저 희한한 ‘무조건 긍정’ ‘무조건 따라하기’의 돌고 도는 강강수월래 속에 재벌의 열쇠는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해보자. 연수네 가족은 소망을 성취했는가? 못했는가? 그들이 자신들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알기나 했을까? 한국인들은 무얼 바라고 여기까지 왔는가? 어쨌든 300배 이상의 물질적 번영을 이루긴 했다. 이보다 더 빠를 수는 없다고 여겨질 속도로. 그런데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 우리는 정말 문명인이 되었을까? 부와 그것은 일치하는가? 그렇다 하자. 부와 교양은 일치하는가? 이런 걸 무작정 따른 것도 문제지만 그걸 무작정 부인하는 것도 우스꽝스런 일이다. 지금 자신을 돌아보라. 그걸 분명 느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초고속으로 발전시킨 이 방법론이 빠뜨린 게 있으니, ‘자기성찰’이 그것이다. 그동안 그걸 유보했다 하더라도, 이젠 할 때다. 그것을 빠뜨린 채로 우리는 스스로를 “우주보다 낯설고 먼” 존재로 만들고 있다. 소설 제목의 뜻도 긴 내력을 품고 유영한다.
◊ 조해진의 『환한 숨』(소설집)
이 소설집에 주목을 하는 이유는 작가가 고통과 슬픔의 저마다의 개별성이라는 아주 까다롭고도 특별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통상 세상의 모순, 그 모순이 야기하는 부당한 관계들, 그 부당함의 작동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거론하면서 우리는 일관된 논리로 설명을 하거나 특정한 해석틀로 그것들을 묶는다. 그래야만 합리적인 이해가 가능하고, 또한 그래야만 힘있는 행동으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현실 비판의 목소리들은 그렇게 일반성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으니, 1990년대 ‘작은 이야기’ 담론과 함께, 개인들의 개별성에 대한 주장이 분출했을 때조차 그랬다. 거기에서의 개별성은 권리와 향락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통들의 개별성의 문제는 꺼내기가 조심스럽지만(이런 문제제기에는 사회적 영향력의 약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반론이 빈번히 개입한다.) 그러나 엄연히 살펴야 하는 실존적 ‘사실’이다. 그것들은 특정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을 아무리 철저히 한다 해도 결코 해소되지 않는 피해자만의 고유한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직면하게 한다. 이 고유한 부분에 근거한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비정하다면 한 사람의 비정은 모두의 비정으로 희석된다고, 세상 어디에도 더 비정한 비정은 없다”
는 생각으로 타인의 고통에서 고개를 돌리는 일을 정당화하는 태도나,
“전체와 영원의 시선으로 본다면 한 사람의 염원이란 퀼트의 한 조각처럼 평균적인 일부이자 보편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는 생각으로 욕망의 비움이라는 처방을 내리는 것은, 기껏해야 일시적 봉합술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작가의 관심은 저마다 상이한 고통들을 어떻게 모두 껴안을 수 있을까, 라는 데에서 벗어나, 저마다 다른 교통들이 어떻게 허심탄회하게, 책 제목을 빌리자면 ‘환하게’ 소통함으로써, 저마다 스스로 치유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를 모색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장의 현실에서는 지난하기만 하여, 거의 불가능한 추구이다.
작가가 비유의 차원으로 건너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즉 비유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상상적으로 강하게 열망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어느 금요일 저녁,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나는 하나의 숨을 생각했다. 그때 지하철은 당산철교를 통과하고 있었는데, 한강 위를 비행하는 갈매기 한 마리가 스스럼없이 내 눈에 들어왔다. 바다가 아닌 강에 나타난 갈매기는 꿈과 현실 사이의 통로에서 길을 잃은 천사의 은유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갈매기는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같은 구절에서 갈매기는 의식불명의 상태에 처한 ‘하나’의 꿈을 서로가 나누어야 할 ‘숨’으로 느끼게끔 하는 감각적인 매개물이다. 이러한 비유적 처리는 불가능한 꿈을 계속 끌고 나가게 하는, 그리하여,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어느 미래에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을 유지시키고 확대하는 장치이다.
이 문제를 곰곰이 살피는 독자라면, 비유가 단지 장식적인 수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방금 말한 맞춤한 비유의 힘을 우리는, 역사 속의 예언자들과 메시아가 비유의 달인이었다는 사례들을 되새겨 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한국의 소설 마당에서 일제강점기 하의 이상(李箱)으로부터 시작해, 1960년대의 김승옥, 1970년대의 조세희, 오정희, 1980년대의 이인성, 1990년대의 윤대녕 같은 뛰어난 은유객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거니와, 조해진을 그 목록 안에 기꺼이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때때로 현실에 대한 불안이 비유의 충동을 지나치게 압박하여 쇄말적 취향으로 번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구효서· 소설가
◊ 조해진 <환한 숨>
그것이 비행기든 배든 자동차든 여행지로 가려면 탈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줄 조해진의 탈것인 소설은 기대에 앞서 안심부터 제공한다. 다시 말해 조해진의 노련하고 단단한 소설 기술로부터 얻게 되는 안전성이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비로소 기대답게 한다는 뜻이다.
이번에 그의 소설이 향하는 여행지는 말할 것도 없이 ‘환한 숨’이다. 소설집 이름이기도 한 ‘환한 숨’은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 <환한 나무 꼭대기>와 <하나의 숨>에서 온 것이기는 하지만 아홉 편의 단편 모두를 아우르는 기운이다.
숨은 살아 있음의 원인이며 결과다. 그러나 살아 있다고 모두 환한 숨이 될 수는 없다. 환한 숨이 아니라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소설은 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환한 숨이라면 살아 있지 않아도 살아 있는 거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조해진의 소설에서는 죽은 자를 보며 죽은 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죽의 자와 숨을 나누어 쉰다. 이처럼 ‘환한 숨’은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생기다. 그것이 생생한 기운인 까닭은 죽은 약자들이 안고 간 고통의 한숨에 대응하는 애틋한 ‘지못미’의 탄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숨 나누기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불량배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왼팔청년과도, 아픈 길냥이와 외로운 유치원생 사이에서도 행해지며, 심지어는 수은 중독으로 숨진 소년 노동자들을 기억하는 공장의 나무와도 이루어진다.
타인은 물론 동물과 식물, 죽은 자와도 숨결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나누어 쥐려면 이들 각각의 항목을 완강히 나누는 범주의 경계를 지우거나 뛰어넘거나 경계선 사이의 틈을 발견해내야 하는데 조해진의 뛰어남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다. 경계 헤치기. 함께 실린 작품 중에 <경계선 사이로>라는 단편도 있거니와 조해진의 소설에서 정작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사납게 얽혀 어두워진 난마의 갈피들을 하나하나 헤치고 기어이 환한 지점에 다다르고야 마는 늠름함이다.
그러나 조해진의 소설은 환해서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다. 환함이란 위안 정도인데 그것을 ‘고통의 위안’이라고 말한다. 지켜주지 못했더라도 고통의 숨을 나누어 쉴 수 있다는 위안. 이 고통과 위안 사이에 놓인, 여간해서는 잡아내기 힘든 겹그림자의 음영을 오롯이 잡아내는 작가의 솜씨가 경탄할 만하다.*
◊ 김연경 <우주보다 낯설고 먼>
무엇이 우주보다 낯설고 멀까. 덕유산 자락에서 태어나 자라던 연수는 부모를 따라 부산 횡령산 자락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나 외가 친척이 사는 거창의 다람재로 잠시 전학을 가야만 한다. 반 년 정도에 지나지 않은 시골 생활이었지만 다시 부산에 돌아오자 한나절 이전의 다람재의 세계가 말할 수 없이 아득해진다. 부산이라고 해 봤자 여전히 산자락이었지만 그래도 덕유산과 다람재에 비하면 완전 딴 세상이었으니 다람재에게는 부산이, 부산에게는 다람재가 우주보다 낯설고 멀었을 것이다.
비단 공간의 문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산과 거창을 오가는 사이에 시간의 함수, 즉 연수의 성장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부산과 거창이 그토록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멀다’가 공간과 시간에 공히 사용되는 용언인 것도 그 때문일 것이며, 한나절이라든가 반년이라는 단위도 폭풍 성장하는 아이에게는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성장이라고 말했듯이, 김연수의 고향과 이동반경,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 김연경의 이력과 이름을 볼 때,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가 직접 밝혔듯이 <우주보다 낯설고 먼>은 성장소설이며 자전소설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태어나서 고등학교 3학년 나이까지라면 신체적 성장이 완성되는 시기일 뿐만 아니라 감각과 의식을 통해 저장되는 기억의 양이 생애의 7할에 해당할 정도이니 가히 자전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성장소설이며 자전소설이라고 말해버리고 나면 어딘가 밋밋해져 이 소설의 진짜 맛이 묻혀버리는 것 같다. 이 소설의 맛은 말할 것도 없이 단숨에 읽게 하는 재미며 그 재미는 김연경의 입담과 유머에서 나온다.
유머라고 했으나 순간순간 반짝이며 웃음을 선사하는 유머라고만은 할 수 없다. 물론 수없이 많은 문장들이 배를 잡고 웃게도 만들지만 실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웃음이 이 소설의 전체를 아우르는데, 어쩌면 그것은 울음을 삼킨 웃음일지도 모르겠다. 김연경의 솜씨가 빛나는 것도 이 지점에서다.
그런 웃음은 언제나 당장 나오는 법이 없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울음이 저만큼 아득해졌을 때 배어나는 것이며, 좀 더 여유를 갖게 되면 눈물도 유리구슬놀이 같은 유희가 되기도 한다. 온전한 내 기억인데도 우주보다 낯설고 멀게 느껴질 때 말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절박했던 과거의 무지한 삶들이 할퀸 흉터가 절로 웃음으로 발효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른다고 모든 게 아득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또 한 번의 성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생한 만큼 여간해서는 ‘멀어지지’ 않으려는 과거에게 기억만을 오롯이 남기고 떠날 수 있도록 사랑과 위로의 작별을 고하는 것. 어쩌면 이것이 잘 쓴 김연경의 ‘성장소설’일지도 모른다.*
◇이승우·소설가
◊ 조해진, ‘환한 숨’
소설 쓰기도 일이어서 오래 하다 보면 능숙해지고 기민해진다. 근육이 단련되지 않을 리 없고 요령이 생기지 않을 리 없다. 단련된 근육과 요령으로 쓴 소설은 읽기도 편하다. 20년 가까이 쉬지 않고 쓰고 있는 작가의 소설을 읽는 일이 여전히 편하지 않다면 이 작가가 단련된 근육과 요령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조해진은 능숙해지고 기민해지는 것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능숙하고 기민한 독서 또한 허용되지 않는다. 누구나 의식하지 않고 쉬는 숨을 의식하지 않고는 ‘하나의 숨’도 쉬지 않겠다는 듯한 도저한 정신 앞에서 독자는 자주 숨을 참게 된다.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약한 사람들의 처지에 민감한 이 작가의 윤리적 시선은 이번 작품집에도 여전하다. 사회적 이슈가 되는 현장 속으로 독자를 초대하되,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관여되어 있는 개별 인물(의 내면)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의 소설들은 우리가 섬세하지 못해서 누군가의 아픔이나 말해지지 않은, 말하기 어려운 진심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섬세하지 못한 것은 윤리적으로 잘못일 수 있다는 사실도. 예컨대 심심하다고 말하는 ‘하나’들의 덤덤한 목소리에서 우리는 무서움을 호소하는 일종의 절박한 조난신호를 알아차려야 한다.
이번 소설집에 들어 있는 거의 모든 소설들에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나오고 죽음에 대한 이미지와 성찰도 눈에 띈다. 갈매기거나 구름, 원시적 하늘 같은 이미지들. 소설 속 인물들은 ‘이곳과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처럼 보이는 달을 보며 이 세계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하면(‘환한 나무 꼭대기’), ‘어둠 속으로 느슨하게 번져가는 노란 빛’을 보며 죽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꿈의 입구’를 떠올리기도 한다(‘눈 속의 사람’). ‘조금씩 흐릿해지고 엷어지다가 마침내 구름 속에서 기화되는 것’이 죽음의 이미지로 제시되기도 한다(‘흩어지는 구름’). 소설 속 인물들은 죽음의 시간에, 죽음의 시각으로 생을 본다. 그의 소설을 읽는 일이 엄숙해지는 일이기도 한 이유이다. 윤리적 시선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성찰을 함께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번 소설집은 특별하다. 숨-생명에 대한 작가의 집중력은 간절하고 절박한데, 그 때문에 생명이라는 단어는 생존의 다른 이름으로 들린다. ‘숨결보다 뜨거운’ 것은 없다. ‘허공의 차가운 숨결도 다른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가면 뜨거워질 수밖에 없다.’
◊ 김연경, ‘우주보다 낯설고 먼’
남미의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5대에 걸친 한 가문의 흥망성쇠의 기록인 자신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의 제목을 ‘집’이라고 지으려고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연경이 ‘우주보다 낯설고 먼’의 제목을 ‘집’이라고 지을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우주보다 낯설고 먼’을 읽으면서 나는 ‘백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렸고, 어쩌면 작가가 ‘집’이라는 제목을 붙일까 고민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 마콘도라는 가상의 마을을 중심으로 5대에 걸친 한 가문의 이야기를 환상적 서술을 통해 전개한다면, ‘우주보다 낯설고 먼’은 한국의 근현대사 속 집(의 변화)을 중심으로 3대의 가족 서사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규모나 스타일은 다르지만, 비신화화된 ‘백년 동안의 고독’이라고 할만하다. 이 소설은 유숙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김준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연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백년 동안의 고독’이 우르슬라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호세 아르카디오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과 같다. 그러나 김연경의 인물들은 신화나 환상의 너울을 쓰지 않고 있다. 과장도 미화도 없다. 누구도 특별하거나 신비스럽지 않다. 그의 인물들은 착한가 하면 추악하고, 성실한가 하면 불성실하다. 마냥 나쁘기만 한 사람도 없고, 시종일관 운이 사납기만 한 사람도 없다. 꾸밈없이 그려내는 생생한 재현 때문에 캐릭터에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나 그런 좌충우돌과 요령부득이 현실의 인간 아닌가.
모처럼 만난 리얼리즘 소설의 맛! 거기다가 지난 시절의 풍속을 구경하는 즐거움까지 느끼게 하는 반가운 소설이다.
◇김인숙·소설가
◊ 조해진 ‘환한 숨’
“어차피 세상은 믿고 싶은 것만 믿잖아요. 편한게 진실이 되기도 하니까.”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정찰병으로 활동했던 한 노인의 증언을 채록하면서 단편 ‘눈속의 사람’ 속 화자가 하는 말이다. 이 대사는 특별하지 않고, 오히려 어디서든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세상에 대한, 진실에 대한, 혹은 인간이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소설적 질문이라면 어떨까.
이 단편 소설에는 또 이런 구절이 나온다.”과거를 증언하는 일은 의무감으로 가능했겠지만 그 과거가 극적으로 기억되는 걸 묵인하는 것은 훨씬 더 순도 높은 용서가 전제되어야할 터이다.” 한 문장 안에 증언과 기억과 묵인과 용서라는 단어가 한꺼번에 나온다. 아홉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조해진의 소설집 ‘환한 숨’ 은 이 네 단어의 가차없는 만남과 충돌로 읽힌다. 산업재해, 기간제 교사, 언론 파업, 성범죄 등 사회적인 폭력에 대한 작가의 질문은 끈질기고, 거듭된다. 그러나 고발이 아니다. 증언도 아니다. 조해진의 소설이 주목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이다. “감각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경계선' 사이에 있는 개인. 그들은 어찌하여 거기까지 와서, 거기에 있는 것들로부터 상처를 입는가. 게다가 거기는 어디인가. 감각되지 않는 경계선이라고 했지만, 조해진은 온몸으로 그 경계선을 감각하는 듯하다.
자전소설로 읽히는 ‘문래’에 이르면 조해진의 소설의 계보가 읽히는 듯하다. 문래라는 지역의 이름을 한자로 풀어 ‘나의 문장이 그곳에서 왔다’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그곳은 작가의 태생지인 서울의 문래동이기도 하고, 작가의 성장서사이기도 하고, 문학적 지평과 열망이기도 하다. 문래에서 문래의 것들과 함께 성장한 그녀의 문장은 탄탄하다. 쉽게 쓰여진 문장이 아니다. 이 말은 찬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터인데, 그 문장을 쫓아가다보면 읽는 사람조차 숨이 가빠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했다.
그러나 편안한 숨으로 소설이 읽힐 수 있는 세상이겠는가. ‘결국에는 환해지는 그런 이야기’를 간절히 꿈꾼다는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좋은 소설을 읽는 일이란 숨이 가빠지는 일이 아닐까. 한 단어, 한 문장, ‘최선을 다 해’ 쓴 소설이라면 더욱이 말이다.
◊ 김연경 ‘우주보다 낯설고 먼’
이 소설은 시작도 끝도 없다. 그냥 어느날 시작되어 어느날 문득 끝나는, 그러나 삶으로 가득찬 소설이다. 오직 삶으로만 가득찬 소설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이야기 대신 살아가는 시간의 순간들로 차곡차곡 채워진.
1970년대에서 80년대를 살아갔던 가난한 사람들. 그 가난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생생한지 그 실감이 오히려 낯설 지경이다. 내 이웃과 가족과 바로 나자신이 거쳐온 시절임에도 그토록 ‘우주보다 낯설고 멀게’ 여겨지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달라져서는 아닐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것을 잊고, 잃고 살아가며, 동시에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 또한 잊거나 잃어버리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이야기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저 보여줄 뿐인데 이야기로 들린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당혹스러움도 없지 않다. 이렇게 끝난다고? 그러나 어쩌면 그게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살아가는 일에 시작이 어디 있고 끝이 어디 있겠나. 그것을 굳이 이야기로 엮으려는데서 생기는 작위성으로부터 이 소설은 아주 멀다. 생생해서 매혹적이고, 멀고 낯설어서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