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 발굴 전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체조를 하고 있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하! 하!”

오전 9시, 빠른 비트로 편곡한 트로트 가락이 발굴 현장에 울려 퍼졌다. 조별로 띄엄띄엄 서 있던 인부 110여명이 노래에 맞춰 체조를 시작했다. 평균 나이 67세. 이들은 한 소절이 끝날 때마다 오른팔을 위로 뻗으며 힘차게 “하! 하!” 구령을 복창했다. 경북 경주시 인왕동 ‘경주 월성’(月城·사적 제16호)의 아침 조회 모습이다.

월성은 신라 건국 초기부터 멸망할 때까지 지속된 ‘천년 궁성(宮城)’. 현재 국내에서 진행 중인 발굴 조사 중 최대 규모 현장으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잠실 종합운동장 두 배 크기인 전체 면적 21만2194㎡에 달하는 신라 궁궐터를 7년째 발굴 중이다. 연구원 53명에 등록된 인부가 120명. 10년간 500억원 예산이 투입되고, 이후에도 수십 년 장기 발굴을 목표로 체계적 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는 발굴 현장도 덮쳤다.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지난해 상반기엔 아예 발굴이 중단됐다가 코로나에 대응하는 시스템을 정비해 9월부터 재개했다”고 했다. 코로나가 바꾼 현장 풍경을 4개의 키워드로 정리했다.

아침 9시, 경주 월성 발굴 현장에서 인부 110여 명이 트로트 가락에 맞춰 체조를 하고 있다. 평균 나이 67세인 인부들이 땡볕에서 종일 마스크 쓰고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칭과 건강 점검이 필수 사안이 됐다. 코로나가 바꾼 발굴 풍경을 드론으로 촬영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트로트와 함께하는 아침 조회

오전 8시 45분. 출근하는 인부 한 사람씩 발열 체크를 했다. 월성 발굴 인부는 모두 동네 주민. 자격 요건이 ‘경주 시민’이다. 대부분 65~70세 고령자들이라 만성질환자들의 약물 복용 체크도 필수다. 연구소는 지난 4월 국내 발굴 현장 최초로 안전관리원을 채용했다. 혹시 모를 현장 사고에 대비하고 코로나 상황에도 대응하기 위해서다. 다같이 트로트를 들으며 체조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전에 없던 풍경. 최영아 안전관리원은 “어르신들이 하루종일 마스크 쓰고 땡볕에서 작업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칭과 건강 체크가 필수”라고 했다.

오전 8시 45분. 월성 발굴 현장 연구원들이 출근한 인부(오른쪽)의 발열 체크를 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오전 9시. 월성 발굴 현장에서 인부 110여명이 거리를 두고 서서 아침 체조를 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마스크 쓰고 호미질, 1시간 발굴 후 10분 휴식

“이제 작업 시작하겠습니다!” 9시 20분, 조별 이동이 시작됐다. 작은 통에 호미, 모종삽, 쓰레받기 등 장비를 넣은 인부들이 줄지어 현장으로 향했다. 1~2조는 남쪽 성벽 발굴. 계단을 조금씩 잘라가며 축성(築城) 과정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장기명 학예연구사는 “4세기 무렵 월성을 처음 쌓기 시작해 언제 대규모 보수가 이뤄졌는지 확인 중”이라고 했다. 이날 경주 기온은 섭씨 29도. 땡볕에 마스크 쓴 인부들이 지치지 않게 1시간 발굴 후엔 10분 휴식 시간을 갖는다. 20년 경력의 1조 반장 홍성익(72)씨는 “신라 역사의 중요한 현장을 경주 시민인 내 손으로 찾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오전 9시 20분. 조별 이동이 시작됐다. 1조 발굴 인부들이 작은 통 안에 호미와 모종삽, 쓰레받기 등 개인 장비를 넣고 남쪽 성벽 발굴 현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김동환 기자
왼쪽은 마스크를 쓰고 남쪽 성벽을 발굴하는 인부들. 오른쪽은 한 줄로 나란히 앉아 물체질하는 여성들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커다란 대야에 둘러앉아 작업했으나 코로나 이후‘1인 1대야’로 바뀌었다. /김동환 기자
경주 월성 현장에서 인부들이 남쪽 성벽을 발굴하는 모습. /김동환 기자

체질은 한 줄로 거리 두기

월성은 다른 발굴과 달리 여성 인부들이 대거 채용됐다는 점도 독특하다.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변을 둘러 판 연못) 뻘층에서 파낸 진흙 덩어리에서 찾아낸 씨앗이나 토기 조각을 물체질로 걸러내는 작업을 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대형 고무 대야를 둘러싸고 여러 명씩 모여 앉아 작업했지만, 코로나 이후론 한 사람당 대야 하나씩, 한 줄로 나란히 앉아 체질을 한다. 6년째 물체질 인부로 작업 중이라는 이정임(68)씨는 “마스크 쓰고 일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이 일을 하면서 근육도 생기고 몸에 힘도 생겼다”며 “월성 발굴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보약을 먹고 사는 기분”이라고 했다.

월성 발굴 현장에서 여성 인부들이 해자 뻘층에서 나온 진흙 덩어리에서 씨앗과 토기 조각 등을 거르는 물체질 작업을 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1인 1대야'로 바뀌었다. /김동환 기자

점심은 지정석에서 도시락

오전 발굴이 끝나면 조별로 마련된 휴식 공간으로 돌아간다. 점심은 각자 싸온 도시락으로 지정석에서 먹고, 10분 체조 후 오후 발굴이 시작된다. 이종훈 소장은 “월성은 향후 20~30년 이상 내다보는 장기 발굴이기 때문에 경주 지역 어르신들에겐 안정된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고 있다”면서 “1960~70년대 경주를 발굴한 고적조사단원들은 늘 노란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모자만 봐도 식당에서 외상이 될 정도라 자부심이 대단했다. 지금 월성을 발굴하는 분들도 신라 궁궐을 파고 있다는 자부심이 다들 엄청나다”고 했다.

점심은 각자 싸온 도시락으로, 지정석에 앉아 먹는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월성에선 1600년 전 신라인의 ‘삶의 흔적’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미니어처 배[舟]와 방패, 멧돼지·말·개·바다사자·곰뼈 등 동물뼈, 신라시대 씨앗 및 열매 74종 등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물들이 나왔고, 지난 2017년엔 서쪽 성벽 문 터에서 한 쌍의 유골이 나와 건물을 지을 때 사람을 희생시켜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의 흔적이 국내 처음으로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50년 동안 발굴 중인 일본 나라(奈良)의 8세기 궁궐 유적 헤이조큐(平城宮)처럼, 월성은 수십 년 장기 계획을 갖고 체계적으로 발굴 중인 모범 사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