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에 대중 음식점이 언제부터 들어섰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900년대부터 서울에는 온갖 음식점이 문을 열었다고 소개한다. 고급음식점인 ‘조선요리옥’을 비롯, 냉면집, 장국밥집, 설렁탕집, 비빔밥집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남녀노소, 계층 구분 없이 한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일은 그 전까지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그중 설렁탕은 가장 인기있는 메뉴였다. 하지만 일부 양반계층이나 모던 보이, 모던 걸은 설렁탕을 먹고 싶어도 직접 음식점에 가서 먹는 걸 꺼렸다. 설렁탕 집에선 이런 고객을 위해 배달 서비스를 시작했다.(주영하, ‘백년식사’ 60쪽)

조선일보 1930년 4월25일자에 실린 광고. 당시 유행하는 조미료 아지노모토를 넣으면 배달주문이 폭증한다는 상품광고다. 자전거에 그릇을 얹고 거리를 달리는 배달부 모습을 실었다

1920년대는 자전거 음식 배달 전성시대였다. 설렁탕과 냉면, 국밥, 중국음식이 주요 메뉴였다. ‘동지 섣달에 비가 오다니 이런 괴상한 일기가 또 어디 있나! 9일의 경성 시내는 밤새도록 퍼붓는 때아닌 비로 인하여…하루에도 수백그릇씩 팔아먹는 설렁탕집에서 설렁탕의 주문을 산같이 받아 놓고서도 거리가 미끄러워서 배달을 해주지 못하여, 수백원어치의 손해를 보았다는 것도 거짓말 같은 정말이야.’(조선일보 1928년1월10일자 ‘자명종’)

모던 걸 부부, 아침은 배달, 저녁은 ‘테이크 아웃’ 설렁탕

아침 식사로 설렁탕을 배달시켜 먹는 신여성 주부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개벽사에서 발간한 대중잡지 ‘별건곤’ 1929년12월호는 ‘무지의 고통과 설넝탕 신세, 新舊가정생활의 장점과 단점’이란 글에서 막 결혼했거나 가정부를 둘 처지가 안된 신여성 부부의 일상을 이렇게 소개했다. ‘신가정을 이루는 사람은 하루에 설렁탕 두그릇을 먹는다고 합니다. 돈은 넉넉지 못한데다가 아침에 늦잠을 자고 나니 속은 쓰리지만은 찬물에 손넣기가 싫으니까 손쉽게 설렁탕을 주문한답니다.’

모던 보이, 모던 걸 부부는 오후 늦게는 손을 마주 잡고 구경터나 공원 같은 데로 산보를 다니다고 소개한 뒤 ‘저녁 늦게나 집에 들어가게 되니까 어느 틈에 밥을 지어먹을 수없고 또 손쉽게 설렁탕을 사다 먹는답니다.’라고 썼다. 아침은 배달, 저녁은 ‘테이크 아웃’ 설렁탕으로 두끼 식사를 해결한다는 얘기다. ‘별건곤’은 1929년 9월에도 ‘근래에 소위 신식 혼인을 했다는 하이카라 청년들도 이 설렁탕이 아니면 조석을 굶을 지경’이라고 썼다.

서울 대표음식 설렁탕

설렁탕은 서울을 대표하는 음식점 메뉴였다. 외지인은 설렁탕 맛을 알려면 3년은 걸린다고 했다. 조선일보 1938년 10월13일자는 설렁탕을 주제로 한 기사 ‘색연필'을 실었다. ‘팔도강산의 자랑스러운 문물이 다 모인 옛 왕도, 맛득하고 사치하기로 으뜸인 서울에서 소를 머리와 발쪽 그대로 삶아서 국을 만들어 파는데 거리의 상인도 양복쟁이도 소위 양반도 상하없이 먹는다고.’

기사는 이어진다. ‘오뉴월에 진땀을 흘리며 먹는 맛도 제맛이요, 추운 겨울에 밤늦어서 뜨뜻이 배를 채우는 맛이란 또 그럴 듯한 것이다.’ 당시에도 설렁탕을 뚝배기에 담아냈는데, 그릇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모양이다. ‘설렁탕의 음식 그맛도 맛이려니와 그 그릇인 뚝배기 밑창을 숟갈로 긁는 소리의 귓맛까지 알게 되야 그 진미를 안다는 것인데, 이제 와서 개량한다고 설렁탕을 뚝배기와 영 이별을 시킨다면 어떨까. 설렁탕의 서울 취미로 보아서는 큰 실수라고도 할 것이다.’

교통사고 줄잇고 동맹파업 벌이기도

자전거 배달이 많다보니, 교통 사고도 심심찮게 났다. ‘시내 관철동 180번지 화천옥 배달부 신점석(19)은 29일 오전 1시경에 자전거로 종로4정목으로부터 질주하여 오던 중 종로 3정목 앞지대에서 시내 종로1정목 39번지 최해산(26)이 운전하여 오던 京第247號 자동차와 충돌되어 전기 최점석(신점석의 잘못)은 자전거에서 떨어지며 뇌진탕을 일으키어 인사불성에 빠진 것을….’(조선일보 1929년4월30일) 당시 신문 사회면에 종종 등장하는 기사다. 전차에 받히거나 반대로 어린 아이를 치어서 다치게 하기도 했다.

자전거 음식 배달인들이 저임금에 항의해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평양냉면 본고장 평양에서 1929년 4월 자전거 음식배달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평양 각 국수집에서 자전거로 국수를 배달하는 면옥노동자들은 지난 21일 각 국수집 주인에게 대하여 아래와 같은 임금 인상 요구를 하고 그간 수차 회의를 거듭하던중 지난 31일에 이르러 교섭은 파열이 되고 금월1일부터는 자전거 배달 노동자들이 파업을 단행하는 동시에….’(조선일보 1929년 4월2일자 ‘평양 냉면상의 자전차배달인 파업’).

‘일급 60전에서 70전 인상' ‘외상 대금의 책임 부담과 기구파손 손해 배상을 노동자에게 물리지 말 것' ‘만일 앞과 같은 책임을 노동자에게 지울 것같으면 일급을 1원20전으로 인상' 등을 요구했다. 주인들은 거부했고, 국수집 자전거 배달은 중지됐다. 평양 냉면집 배달원 파업은 그후에도 종종 보도됐다.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지 '조광' 1935년 11월호에 실린 음식배달원 인터뷰. 얼음판에 미끄러져 그릇을 깨뜨리면 눈물이 나올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음식 배달원의 꼴불견 목격담

조선일보가 발행한 월간지 ‘조광’ 1935년11월호에 음식배달원의 생생한 증언이 나온다. ‘한그릇에 일전씩, 塵合泰山 의 苦夢’. 거리의 직업인을 1문1답으로 소개하는 코너였다. 배달비는 그릇당 1전씩. 설렁탕, 냉면이 한그릇에 15전이던 시절이었다. 이 배달부는 싼 배달비 때문에 ‘생활이 곤란해 견딜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게다가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이 제일 괴롭다고 했다. 얼음판에 미끄러지면 그릇·음식값을 다 물어내야했기 때문이다. 배달중 목격한 에피소드가 생생하다.

‘어느 겨울밤이야요.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찬 때인데 냉면X그릇과 약주술을 가져오란 전화가 오겠지오. 그래 그걸 제가 메고 가게되었는데…’냉면 가져왔습니다' 했더니 안에서 ‘식모, 대문 좀 열어’하고 두어서너마디 여자의 목소리가 나겠지요! 나는 가슴이 두근러기는 것을 참고 잇다가 열어주는 대문을 쑥 들어서 마루 위에 냉면 그릇을 내려놓고 안방편을 쓱 들여다 봤더니 아니 그게 무업니까……문틈으로 보이는 남녀의 모양이 눈에 휙 띄지 않겠지오. 그러나 그들의 꼴이란 말못할 경지에 이르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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