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별안간 가만히 있었다/씹었던 불고기를 문 채로 가만히 있었다/아니 그것은 불고기가 아니라 돌이었을지도 모른다/신은 곧잘 이런 장난을 잘한다’(김수영 시 ‘永田絃次郞’)
김수영(1921~1968)은 1960년 12월9일 이 시를 썼다. 느닷없이 시작한 이 시의 2연에는 사연이 나온다. 일본에 가는 친구와의 모임에서 이토추 상사 신문 광고를 보다가, 거기에 실린 ‘곳쿄노 마치’(國境の町·국경의 거리)라는 노래 음반을 낸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郞) 얘기가 나왔다. 그해 초 김영길이 북송선을 탔다는 보도(조선일보 1960년 1월19일 ‘테너 김영길 북송을 자원’)가 나온 참이었다.
‘아니 김영길이가/이북으로 갔다는 김영길 이야기가/나왔다가 들어간 때이다//내가 나가토(長門)라는 여가수도 같이 갔느냐고/농으로 물어보려는데/누가 벌써 재빨리 말꼬리를 돌렸다……/신은 곧잘 이런 꾸지람을 잘한다’
나가타 겐지로는 일본에서 활약하던 테너 김영길(金永吉·1909~1985)이다. 일제시대 군국가요 음반을 많이 녹음한 성악가였다. 나가토는 김영길과 함께 킹레코드 전속가수로 ‘애마진군가’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를 듀엣으로 부른 소프라노 나가토 미호(長門美保, 1911~1994)였다. 둘이 함께 부르는 군국가요를 숱하게 들었던 김수영은 나가토가 따라가지 않았냐는 농을 한 것이다. 천황을 찬양하던 그가 북한의 인민 낙원 건설을 위해 북송선을 탔고, 이런 아이러니조차 맘대로 비꼴 수없는 불편한 시대상황을 김수영은 ‘신의 꾸지람’으로 풀이했다.
◇잊혀진 스타, 김영길
김영길은 일제 시대 조선인 최고 테너로 이름을 날렸지만, 우리 음악사에선 거의 잊혀진 존재다. 평안남도 중화군 출신인 그는 1928년 평양제2중학을 졸업한 뒤 일본 육군 도야마(戶山)학교 군악대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전공해 이듬해 수석 졸업했다. ‘소학교시대부터 음악을 좋아했다’는 김영길은 ‘(중학교)졸업후에는 변성기도 지나고 해서 성악가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新人文學’ 1935년 12월)고 인터뷰에서 밝힌 것을 보면, 일본에 건너갈 때부터 성악에 뜻을 둔 것같다.
김영길은 1933년 일본 시사신보사 주최 제2회 음악콩쿠르에서 입선했고, 1934년과 1935년에도 2위로 입상했다. 1935년 일본청년회관에서 가진 첫 독창회는 호평을 받았다. 여세를 몰아 같은 해 10월3일 조선중앙일보 주최로 경성공회당에서 독창회를 열었다. 음악평론가로 활동한 홍종인(훗날 조선일보 주필·회장)은 김영길이 부르는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도니체티 ‘사랑의 묘약’중)을 듣고 ‘청투(淸透) 또 감미(甘美)한 성색(聲色)과 곡의 정확과 기교의 자연에 절로 머리가 숙여짐을 느꼈다’(조선일보 1935년 10월6일 ‘김영길군 독창을 듣고’)고 호평했다.
◇세계적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와의 만남
김영길이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1936년 일본이 낳은 세계적 소프라노 미우라 다마키(三浦環·1884~1946) 상대역으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에 출연하면서부터다. 미우라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비롯해 런던, 밀라노, 로마, 피렌체, 나폴리 오페라극장에서 ‘나비부인’ 주역 초초상에 2000회나 출연한 오페라 스타다. 1935년 시칠리아 팔레르모 극장에서 2000번째 초초상을 부른 그는 그해 말 일본에 영구 귀국했다.
이듬해 6월 2001회째 출연한 ‘나비부인’ 전막을 이태리 원어로 공연했는데 이 공연에서 스물일곱 청년 김영길이 상대역 핀커튼을 맡은 것이다. 공연장은 도쿄 중심가 긴자의 가부키좌. 6월27일과 28일 저녁 7시30분 메인 공연을 미우라와 함께 김영길이 섰다. 이틀째 공연 1막은 시즈오카 라디오 방송(JOPK)을 통해 실시간 중계할 만큼 화제를 모았다.
◇1937년 조선의 첫 전막 오페라 ‘나비부인’ 주역
미우라 다마키는 1937년 5월 26일과 27일 경성 부민관에서 올린 전막 오페라 ‘나비부인’에 출연했다. 역시 김영길이 상대역 핀커튼을 맡았다. 일본 공연과 같이 일본 중앙(中央)교향악단, 미우라 다마키 합창단 등 오케스트라와 합창단까지 일본에서 건너왔다. 조선 땅에서 열린 첫 전막 오페라 공연이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가 후원한 이 공연 티켓 최고가 특등석은 5원, 일등석은 3원이었다. 특등석은 설렁탕이나 냉면(각 20전) 25인분 값이었다. 당시 신문 광고엔 미우라 다마키와 김영길을 각각 ‘세계적 명가수’, ‘천재적 테너’로 소개했다.
◇조선 창작 가곡 적극 불러
김영길은 1939년 3월3일 경성공회당에서 음악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리사이틀에 출연했다. 공연은 대성황이었다.(조선일보 1939년3월4일 ‘풍성한 음률의 파도, 청중은 무아경에’) 미리 공개된 이날 프로그램은 독특했다. 마스네의 ‘베르테르’, 푸치니 ‘라 보엠’의 오페라 아리아로 시작한 이날 프로그램엔 작곡가 박태준의 창작가곡 ‘가는 사람’ ‘부끄러움’이 포함돼 있었다.
박태준(1900~1986)은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하는 동요 ‘오빠생각’과 가곡 ‘동무생각’ ‘냉면’으로 유명한 작곡가였다. 이흥렬의 ‘마을색시’ 박태준의 ‘고향하늘’(동요)은 앙코르곡으로 불렀다. 작곡가가 성악가의 친족이거나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우리 가곡을 부르는 일이 매우 드물던 시절이었다. ‘조선의 악인에게서 우리의 노래와 멜로디를 듣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든 일이다.’(‘박문’1939년6월호) 이 때문에 조선의 창작가곡을 레퍼터리에 대거 포함시킨 김영길의 시도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군국주의 가요 음반 취입
김영길은 193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킹레코드 전속가수로 활동했다. 1935년부터 ‘일본 행진곡’ ‘소년 전차병의 노래’ ‘우리는 병사로 부르심을 받았다’ ‘천황의 백성인 우리들’을 불렀고 1945년엔 ‘카미카제노래’ 등을 불렀다. 1941년 내선 일체와 지원병 장려 등을 위해 만든 국책 영화 ‘그대와 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유튜브에선 지금도 그가 부르는 ‘출정 병사를 보내는 노래’ ‘애마행진곡’ 등을 들을 수있다. 복잡한 삶이었다.
◇'신은 이런 장난을 잘한다’
김영길은 1945년 이후 후지와라 오페라단을 중심으로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 ‘토스카’ ‘라보엠’ ‘카르멘’ ‘아이다’ ‘파우스트’ 등 주역으로 무대에 활발히 섰다. 그가 왜 북송선을 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북 출신이라 고향에 돌아간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1959년12월부터 1984년까지 북송선을 탄 재일교포(재일조선인)는 9만3340명. ‘북한행 엑서더스’를 쓴 테사 모리스-스즈키 호주국립대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거의 전원이 남한 출신이었다. 재일교포의 97%가 남한 출신이었으니, 그럴 만하다. 모리스-스즈키 교수는 ‘일본에서 민족적 마이너리티로서 차별 대상이 되었던 귀국자들은 북한에서도 곧바로 ‘사회적 마이너리티’로 식별되어 버렸다’고 썼다.
김영길은 1960년 3월 공훈배우 칭호를 받고,국립예술극장 국립교향악단 국립가극극장 독창 가수로 활약했다. 그러다 그가 강제 노동 수용소로 갔다는 보도가 나왔다.(조선일보 1994년 8월5일 ‘북 정치범 15명 신상확인’) 북송 교포들을 추적해온 전직 조총련 간부가 북한 ‘승호마을’수용소에 수감된 정치범 가운데 김영길의 신상자료를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KBS가 1995년 내보낸 다큐멘터리 ‘통한의 증언ㅡ북송선’도 김영길이 북송 몇 년 후 행방불명됐고 가족들도 수용소를 거친 후 소식이 끊겼다고 소개했다. 북송선을 탔을 때만큼이나 느닷없는 소식이었다.이후 복권됐다는 얘기도 흘러나왔으나 정확한 내막은 알 수없다. ‘신은 곧잘 이런 장난을 잘한다’던 김수영은 그의 운명을 내다본 것일까.
◇참고자료
김응교, 일본을 대하는 김수영의 시선,민족문학사 68, 2018
田邊 久之 , 考證 三浦環 新版, 幻冬舍メディア, 2020
테사 모리스-스즈키 지음,한철호 옮김, ‘북한행 엑서더스’, 책과함께, 2008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 보고사, 2012
A기자, ‘천재조선의 대기염-김영길씨와의 일문일답기’, 新人文學 1935년 12월호
王耳生, ‘음악실’, 博文 6,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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