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저기 미쓰코시 가서, 난찌 먹구 가요.”
“난찌? 난찌란 건 또 무어다냐.”
“난찌라구, 서양 즘심 말이에요.”
기생 춘심이는 윤직원 영감과 데이트하면서 미쓰코시 백화점 양식을 먹자고 조른다. 채만식(1902~1950)이 1938년 월간지 ‘조광’에 연재한 ‘태평천하’(원제 天下太平春)에 나오는 대목이다. ‘난찌’는 점심 식사를 뜻하는 ‘런치’(Lunch)의 일본식 발음이다.
미쓰코시는 1930년 10월 경성 조선은행(한국은행) 본점 건너 편에 들어선 고급백화점.지금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쓰이는 이곳은 이상이 자주 찾던 명소였다.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이상이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지 ‘조광’ 1936년 9월호에 실은 ‘날개’의 피날레 부분이다. 미쓰코시 옥상 정원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려했던 이상은 몇 달 뒤 도쿄에서 스물 일곱 아까운 삶을 마감했다.
◇”백화점 식당은 행복을 스스로 느낄 수있는 사람이 찾아온다”
1930년대 백화점에서 먹는 ‘난찌’는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선망하던 코스였다. 가족들의 외식 장소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했다.
‘백화점 식당ㅡ 그곳은 원래가 그리 불행하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러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다. 하로 하로를 평온무사하게 보낼 수있었든 사람, 얼마간이라도 행복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든 사람, 그러한 이들이 더러는 아내를 동반하고 또는 친구와 모여서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자녀들을 이끌고 결코 오랜 시간을 유난스러웁게 즐기기에는 적당치 않은 이곳을 찾아온다.’(‘조광’ 1936년6월)
1930년대 경성 스케치로 유명한 박태원은 연재소설 ‘천변풍경’에 이렇게 썼다. 백화점 식당은 1930년대 경성 소비문화의 최정점이었다.
◇미쓰코시 1원50전 양식세트, 화신 70전 한식세트 인기
1920년대부터 경성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백화점은 근대 상품을 전시하는 쇼윈도우이자 첨단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중심지였다. 미쓰코시, 조지야, 미나카이, 히라타 같은 일본계 백화점은 물론 종로 화신백화점은 대부분 옥상에 식당을 설치했다. 백화점 식당은 깨끗하고 음식 값도 상대적으로 싸서 고객이 많았다. 미쓰코시 백화점은 1원50전짜리 양식 세트와 원두 커피 메뉴가 인기를 모았다. 화신백화점은 양식도 팔았지만 70전짜리 한식 정식세트도 인기가 높았다. 주머니 가벼운 월급쟁이 가장도 가족을 위해 호기를 부렸다.
‘젊은 내외가, 너덧 살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그곳에 가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식당으로 가서 그들의 오찬을 즐길 것이다. 흘껏 구보를 본 그들 내외의 눈에는 자기네들의 행복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는지도 모른다.’
박태원이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한 대목이다. 종로 화신백화점 식당을 찾는 젊은 가족의 일상을 스케치했다.
◇세살배기도 백화점 식당가자고 졸라
조선일보 1931년 1월1일자 신년호에 실은 제야(除夜) 기사 제목은 ‘식당에는 開化부인-대경성의 백화점내면’. ‘식당에도 쪽진 머리에 아이들을 반다스나 데리고 앉아 다과를 즐기는 훌륭한 개화(?)부인이 있다’고 썼다. 살림살이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과소비를 우려하는 지적도 나왔다. ‘문화는 조선 사람의 입에까지 미치어 김치 깍두기 된장찌개만으로는 비위를 가라앉힐 수 없게 되었다. 치킨 가쓰레쓰,멘치폴, 무엇무엇 등 입맛이 달라져서 세살 먹은 아기들까지도 밥때가 되면 엄마밥바를 백화점 식당으로 끌고간다. 이삼십원짜리 월급쟁이도 점심저녁은 백화점에서 ‘식도락’(食道樂)도 어지간하다.’(조선일보 1934년7월19일 ‘카메라산보-도회의 측면에서 측면에’) 기자는 ‘집도 없고, 입을 것이 없어도 먹기만 하면 살겠지만 뒷간의 파리, 요강, 타구부터 없앤 뒤에 식도락이 식도락이다’고 꼬집었다.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돈가스… 和洋절충 양식
구한말 손탁호텔처럼 서양인이 경영하는 호텔에서 서양 음식을 전문적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성 시내에 양식 레스토랑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20년대~1930년대다. 호텔과 레스토랑도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가성비 높은 백화점 식당에 손님들이 몰렸다. 순 서양요리보다는 오므라이스, 카레라이스, 돈가스, 함박스테이크처럼 일본화된 양식이 대부분이었다.
◇양식 못먹는 洋裝녀, 애기 울리는 舊式부인
100년전 경성 사람들이 서양 음식에 익숙할 리 없다. 백화점 식당 여종업원이 본 양식당 꼴불견이다. ‘시골서 온냥 싶은 여자손님들 가운데는 음식 이름을 몰라서 쩔쩔매다가 옆 손님을 본받아 양식 같은 것을 주문해놓고 먹을 줄 몰라서 쩔쩔 맬때도 있습니다.’ ‘여우 목도리에 좋다는 두루마기를 입고 온 여자손님이 흔히 식사를 하면서도 목도리를 그냥 두르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몰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다지 높이 보이지 않습니다.’
종업원에게 갑질하는 고객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제일 괴로워할 때는 구식 여자들이 아이를 많이 데리고 와서 음식이 비싸다느니 맛이 없다느니 하고 꾸중을 하는 것은 좋으나 어린 아이들이 제각기 먼저 먹겠다고 싸워서 울음판이 될 때입니다. 여러 손님들이 있는 곳에서 어린애 울음소리가 높이 나면 다른 손님은 상을 찌푸리지 않습니까.’ ‘심부름을 시킬 때 자기 집 하인처럼 말솜씨를 아무렇게나 하는 손님을 대하면 분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어디 입밖에 내 말할 수나 있습니까. 그저 꾹꾹 참고 지나갑니다.’(조선일보 1937년2월4일 ‘양식 못먹는 洋裝녀, 애기 울리는 구식부인’)
◇수프, 소리내며 설렁탕처럼 마시고, 남의 빵 뜯고…
염상섭은 1931년부터 이듬해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소설 ‘무화과’에 조선호텔 양식당을 찾은 중년 신사의 무례를 꼬집었다. ‘선생님이 양식을 처음 잡숫는지, 자주 남의 빵을 뜯어 잡숴 가며 수프를 스푼으로 떠 잡숫다가는, 에이 성가시다고 번쩍 들어 훌훌 마시겠지요… 그거나마 소리나 내지를 않았으면 좋으련만, 설렁탕집으로 알았는지, 훅훅 소리를 내지요. 하하하…게다가 여기저기 돌려다보며, 서양부인네들 유심히 보니까, 저희들도 눈짓을 하고 웃지요! 앉았기가 민망해서 죽을 애를 썼더랍니다…’
◇불친절에 위생도 엉망인 한식당
이태준은 ‘주머니가 푸근하면 양식집으로 가고 그렇지 못하면 일본집 ‘소바’먹으러 가는 것이 보통’(‘유령의 종로’,별건곤 1929년3월)이라고 썼다. ‘그릇과 숟가락이 몇십년 닦지 않은 이빨처럼 싯누런 너리가 앉은 것을 외면도 안하고 ‘헤이끼’(태연하게)로 내어 놓는다. 게다가 음식 나르는 친구들의 의복이란 언어도단이다. 걸레라고 하더라도 빨지 않고는 못 쓸 걸레들이다.’
설렁탕, 냉면 같은 한식을 파는 대중음식점은 식탁이 낮은 데다 의자는 목침 높이 정도로 낮아 음식을 먹다보면 고문당하는 것처럼 온 몸이 결린다고 했다. 불친절한데다 위생도 엉망이었다. 손님들은 ‘현대인’ ‘신경인(神經人)’인데, 북촌(北村) 상인들은 ‘쇠대가리’(牛頭)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며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명월관, 식도원 같은 일류 조선요릿집이 있긴 했지만 100년 전 경성엔 양식, 일식, 한식의 위계(位階)가 이렇게 자리잡았다.
◇참고자료
이태준,’유령의 종로’,별건곤 1929년9월
김연숙,’외식문화의 근대적 변용과 경성의 향토음식,’일제강점기 경성부민의 여가생활’, 경인문화사, 2018
이인영·정희선, ‘1930년대 세태소설에 나타난 경성부민의 식생활 문화연구-염상섭의 ‘삼대’, ‘무화과’와 박태원의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식생활학회지 28-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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