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든 손. 2019년 토니상 작품상을 차지한 ‘하데스타운’ 한국 초연은 이 포스터부터 눈길을 끈다. 낯익은 배우나 하이라이트 장면을 내세우는 여느 뮤지컬과는 전략이 다르다. 꽃 위로 큼지막하게 이런 문장이 박혀 있다.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것. 이번엔 다를 거라 믿는 것.”
‘하데스타운’은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현대로 옮겼다. 이 흥행작의 주역은 배우 최재림(36).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헤르메스를 연기한다. 최재림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비극이지만 ‘오늘은 결말이 달라질 수 있다’는 마음으로 무대에 오른다”며 “1g이라도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가 큰 차이를 만든다”고 했다. 지난 14일 LG아트센터에서 이 배우를 만났다.
“살면서 경험이 쌓이다 보면 시작하기도 전에 어떻게 될지 아는 일들이 많아지잖아요. 사실 해보지 않고는 아무도 몰라요. 중요한 뭔가가 다가왔을 때 ‘또 안 되겠지’가 아니라 ‘일단 부딪쳐보자’는 생각을 좀 더 자주 했으면 좋겠어요. 뭐랄까 ‘정신 샤워’처럼요.”
어릴 적 아버지는 전투기 조종사였다. 소설이나 공연은 인생의 모의 비행 장치다. 최재림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공군 중창단으로 복무하다 뮤지컬을 하는 후임병을 만났다. “성악과 달리 움직임이 활발하고 연기와 춤까지 해낸다는 점에서 뮤지컬에 끌렸어요. 제 운명을 바꾼 노래요? ‘지금 이 순간’입니다. 박칼린 음악감독 앞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가 우연히 오디션에 참여하게 됐고 2009년 ‘렌트’로 데뷔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듬해 큰 암초를 만났다. 뮤지컬 ‘남한산성’에서 악역 정명수를 맡고 연기 부족을 절감한 것이다. ‘하데스타운’에서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노래만으로는 가난과 추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지하 세계로 향한다. 최재림은 “저도 뮤지컬을 계속하려면 폭발적 성량만으론 안 된다고 생각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석사과정)에 진학했다”며 “화술, 움직임, 연기 등 기초 공사를 한 뒤에야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뮤지컬 스타로 고공 비행 중인 최재림은 뮤지컬 배우들 사이에서 ‘레슨 교재’로 통한다. 이 노래를 이렇게 부르는 게 맞나 의심이 들 때 최재림이 표준이 되는 셈이다. 그는 “내가 성악 발성에 머무르지 않고 장르에 따라 소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인 것 같다”며 “음역은 1옥타브 도에서 미까지 내려왔다가 3옥타브 라까지 올라간다”고 했다.
신화 속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심부름을 도맡는 전령신이다. 날개 달린 가죽신을 신고 이승과 저승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다면 뭘 하고 싶을까. 그는 “거 참 피곤할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그럼 미래의 소식까지 가장 빨리 듣겠네요. 누가 대통령이 될지도 알고, 올라갈 코인에도 투자하고(웃음). 제가 사실 우주에 관심이 많은데 저승에 가면 칼 세이건이나 아인슈타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오르페우스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찾으러 간 지하 세계에서 아름다운 음악으로 저승의 왕 하데스를 감복시키고 아내를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다. 하지만 ‘앞에서 걷고 절대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붙는다. “군중 속에 있으면 없던 용기도 솟지만 혼자 남겨지면 의심이 찾아옵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다 하잖아요. 우리도 살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과거를, 지나온 길을. 그런데 돌아보면 안 된다니, 참으로 잔인한 조건이지요.”
이 뮤지컬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는 ‘지옥으로 가는 길2′를 꼽았다. “아주 오래된 사랑 이야기 슬픈 노래/ 그래도 계속 부르리 오랜 노래/ 우리 다시 또다시 부르리라~”로 흘러가는 곡이다. 최재림은 “요즘 사람들이 엄청난 고난을 겪고 있지만 그럴수록 희망과 믿음이 필요하다”며 “이 노래처럼 희망을 버리지 말자, 지치는 데 익숙해지지 말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