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여름 경성 거리는 흉흉했다. 7월15일부터 나흘간 500mm가까운 폭우가 쏟아져 한강 제방둑이 무너졌다. 강물은 용산을 거쳐 남대문 앞까지 밀려올 정도였다.
‘과연 2200戶 전멸상태/시체 200 발견’ ‘교통두절돼야 상세한 현상은 상금미상하나/구사일생의 피난민은 마포역에 수용하는 중’(조선일보 1925년7월15일자) 충청, 영남, 호남 지방도 온통 물난리였다. 8월초까지 그랬다.
100년 전 ‘경성의 밤’을 르포한 기획기사가 이때 나왔다. 사람 넘치는 종로 야시장과 쓸쓸한 탑골공원, 하룻밤 5전짜리 노동숙박소, 하늘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는 광화문, 대한문, 종묘 앞의 노숙자, 자유잃은 서대문형무소 수인(囚人)... 경성 주민들의 애환의 현장을 찾아간 ‘夜경성순례기’(1925년 8월23일~9월2일·총 8회)였다.
◇신사, 기생, 할멈, 아씨…남녀 노유의 活劇
‘조그마한 가게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는 수많은 군중이 질서없이 오고 가고 한다. 자유로이 걸음을 옮길 수없을만치 어깨가 서로 부닥치고 손과 손이 마주치곤 한다. 땀 냄새와 향내는 섞이어 코를 찌른다.’(‘신사,기생,아씨,할멈…인물 진열의 야시장’, 조선일보 1925년8월23일)
여름 밤 전등 불 밝힌 종로 야시장. 남녀학생은 물론, 아이 데리고 나온 할머니, 어멈 데리고 나온 젊은 아씨, 망건 갓에 꼬부랑 지팡이를 끄는 시골 첨지, 함부로 차린 건달패, 기생, 신사가 뒤섞여 인파를 이뤘다. ‘시장’이라기보다 ‘사람 구경터’였다.
갑자기 풍악소리가 천둥치듯 들린다. 극장 우미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명탐정이 악한들을 추격하는 장면이다. ‘싸구려, 싸구려’하고 악쓰듯 물건 파는 상인 소리가 섞였다. 한 곳에선 구경꾼이 서너 겹 둘러싼 가운데 합창 소리가 들린다. ‘창가(唱歌)책’을 선전하는 거리 이벤트다.
‘이렇게 장안 한복판 제일 큰 거리에서는 밤새로 한시 두시가 지나기까지 남녀노유의 자유등장의 활극이 연출되니 이것이 경성 밤 무대의 1막이다.’ 첫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음울한 탑골공원, 평화로운 장충단 공원
다음은 탑골공원. 6년전 ‘독립만세’ 함성이 넘치던 곳이다. ‘풀죽은 모시두루마기에 먼지 오른 갓을 쓰고 발에는 고무신을 신은 사십 가량 되어보이는 사오인의 노인이 무엇인지 수군수군하면서 공원쪽으로 들어간다.’(‘젊은 청춘이 모여드는 안식과 정적의 공원’,조선일보 1925년 8월25일)
마흔은 노인 축에 들었던 모양이다. ‘어두침침한 숲 아래 벤치에 한가한 듯이 걸터앉아 부채로 손장단을 치며 ‘가레스스끼’ ‘가고노도리’ 등 유행창가를 얕은 목소리로 부르고 있는 학생 비슷한 청년들이 둘씩 셋씩 짝을 지어 구석구석 벤치를 찾아 앉는다. 육모정에는 빈틈없이 노동자 여러분이 늦지도 않은 밤에 코를 골고 맨바닥에 누워있다.’ 음울하고 칙칙한 분위기였다.
남산 아래 일본인이 많이 오는 장충단공원과는 대조적이다. ‘우거진 숲사이로 전등은 비친다. 연못을 둘러싼 버드나무는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에 살랑살랑 춤을 춘다. 연못 건너편 언덕에는 수박등을 난간에 보기좋게 달아놓은 찻집이 있고 그 안에는 서늘하게도 차린 일본 젊은 남녀들이 웃고 즐긴다.’
어린 아이 데리고 가족 나들이 나온 젊은 부부, 공원의 밤이 깊어 갈수록 기쁨과 평화와 안식이 점점 무르녹아간다. ‘장안의 밤을 장식하는 공원도 이리하야 완연히 두 갈래로 갈리어 있다.’ 식민 통치의 허구가 민낯으로 완연히 드러났다.
◇무산 계급의 ‘호텔’ 5전짜리 숙소
‘돈 있는 사람의 밤서울은 향락의 꿈터요, 환희의 궁전이 되겠으나 돈 없는 사람의 밤 서울은 한숨의 거친들이 되고 괴로움의 구렁이 될 것이다.’
하층민의 잠자리를 찾아갔다. 종로 북쪽 일본 정토종 산하 화광교원(和光敎園)이 운영하는 노동자숙박소였다. 르포 제목은 ‘무산계급의 ‘호텔’, 一夜숙박료 五錢也'(조선일보 1925년 8월28일). 설렁탕 1그릇에 15전쯤 하던 시절이었다.
‘온 종일 주림을 참아가며 비지땀 흘려 벌어온 이삼십전의 삯전을 움켜쥐고 이곳을 찾아들어 양쌀밥강조밥으로 겨우겨우 소리치는 뱃속을 단속한 후 지친 몸을 방 한구석에 끼어두면 빈대, 모기, 벼룩 등의 물것들이 다시 크게 습격하야 더위와 함께 그들의 단 꿈을 깨뜨리고 만다.’
‘악취가 코를 찌르고 좁기는 관속과 같은 더러운 방’이었다. 근처 단성사에서 들리는 환성과 박수 소리까지 귀를 자극했다. 기자는 물었다. ‘세상의 사람들아! 아는가? 모르는가? 이리하야 날마다 달마다 설움의 밤 서울은 깊어가고 밝아가는 것이다.’
◇'하늘을 이불 삼아 대지위에 잠자는’ 노숙가족
이 돈마저 없어 남의 처마밑, 굴뚝 옆 신세를 지는 빈민도 수두룩했다. 밤 9시만 되면 경성 시내에 가장 너른 광화문통 좌우, 대한문앞 마당, 권농동 성벽아래, 종묘 앞 대문 앞에 부모 처자까지 거느린 가족이나 단신 노숙자들이 모여들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온종일 땀을 흘려서 땀에 결고 또 피폐한 의복은 몸에 달라붙어서 냄새만 나고 온종일 돌아다녀도 저녁 거리를 못얻어서 조밥 한 술도 못얻어 먹고…’
깔 것도, 덮을 것도 없이 맨 땅위에 누웠다. ‘습기는 파리한 몸을 음습하고 깊은 밤 축축히 내리는 여름 이슬은 온 몸을 적시운다.’ 살 길이 막연하니 죽겠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워있는 늙은 부모와 어린 처자를 보고 끝없는 한 숨을 쉬며 세상의 불공평을 원망하고 그 밤을 새우고 말뿐이다.’ (‘하늘로 이불을 삼고 대지위에 잠자는 사람’, 조선일보 1925년 9월2일)
경성의 밤 르포는 서대문 형무소와 윤락가 등 도시의 이면을 샅샅이 훑으며 사진까지 실었다. ‘인육시장’(人肉市場)이란 극한 표현까지 써가며 윤락가를 ‘문명한 도시의 暗黑面’이라고 비판했다. ‘모던 경성’의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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