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루한 사람이야?”
한때 촉망 받는 역사학도였던 마르틴(마스 미켈센). 지금은 무기력한 일상에 찌든 평범한 고교 교사다. 수업에도 도통 열의가 없고, 부부 대화도 단절된 지 오래다. 어느 날 그는 동료 교사의 생일 잔치에서 기상천외한 심리학 가설을 전해 듣는다. ‘인간은 혈중알코올농도가 0.05%쯤 부족한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 정도를 채워주면 더욱 편안하고 창의적일 수 있다’는 내용이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동료 남성 교사 4명은 ‘언제나 살짝 취해 있으면 삶이 즐겁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직접 실험에 나선다.
덴마크판 ‘주당(酒黨) 예찬’이라고 할까. 최근 개봉한 ‘어나더 라운드’는 상영 시간(1시간 56분) 내내 술 내음이 가시지 않는 덴마크 영화다. 지난해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수상작. 아침 기상과 동시에 얼음을 조각낸 뒤 보드카를 따라 마시는 건 물론, 수업 전에는 교내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홀짝인다. 단속 경찰관처럼 음주측정기를 상시 휴대하는 건 기본이다. 이들과 대작하려면 수필집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의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1898~1961) 선생이라도 모셔와야 할 판이다.
알코올중독자의 사랑을 그렸던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가 보여주듯 영화에서 술은 대부분 처절한 파국으로 끝났다. 그에 비하면 ‘어나더 라운드’는 달콤쌉싸름한 희비극에 가깝다. 술이 들어가기 직전의 잿빛 일상을 묘사한 초반에는 근접 촬영을 통해서 주인공의 불안과 권태를 강조한다. 반대로 보드카·와인·샴페인까지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음주 예찬으로 바뀌면서 화면에도 서서히 활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실제로 미켈센을 비롯한 주역뿐 아니라 단역들도 음주한 뒤 촬영에 들어가기도 했다.
56세의 덴마크 배우 미켈센에게는 이 영화가 중년의 ‘대표작’과도 같을 것이다. 할리우드 진출 이후 ‘007 카지노 로열’과 ‘닥터 스트레인지’, 드라마 ‘한니발’까지 악역 전문으로 굳어진 감이 있었다. 하지만 2012년 ‘더 헌트’ 이후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추면서 미켈센은 장르나 배역에 국한되지 않는 성격파 배우라는 걸 다시금 입증한다.
설령 애주가가 아니더라도 미켈센이 항구에서 술을 마시고 춤추는 마지막 장면은 놓치기 아깝다. 실제로 미켈센은 학창 시절 기계체조와 발레를 전공했다. 배우로 데뷔하기 전에는 10년 가까이 전문 무용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초 그는 춤추는 장면에 대해 난색을 표했지만, 감독의 설득에 “30년 만에 춤췄다”고 고백한다. 조조(早朝)든 심야 상영이든 끝나고 나면 영화 제목을 따라서 외치고 싶어질지 모른다. “한 잔씩 더(Another Rou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