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모는 도둑처럼 온다. 그리고 누구나 한 번은 털린다.
삶의 애환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외모, 대머리가 대중문화의 정수리로 진입했다. 인기 웹툰 ‘내과 박원장’이 선봉에 있다. 의사라는 부와 명예의 찬란한 인생 후반전을 꿈꾸며 청춘을 바쳤으나, 개업과 동시에 빚더미와 고지혈증과 원형 탈모만 얻은 내과의 이야기다. “바둑을 좋아해 기원에 자주 간다. 거기 후덕하고 머리 벗겨진 40~50대가 많다. 평범한 주인공으로 딱인듯 싶었다.” 만화가 장봉수(필명·45)씨가 말했다. 장씨는 실제 의사이고, 스토리는 상당 부분 그가 겪은 실화에 기반한다. 화상 인터뷰로 만난 그의 모발은 그러나 풍성했다.
의사가 제작한 메디컬 드라마는 이미 여럿이지만 ‘내과 박원장’은 기존 방식과는 많이 다르다. 대머리도, 주인공의 생활고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웹툰 1화부터 주인공은 괴로워한다. “빚만 3억인데 매달 적자가 1000만원이야!” 개업은 했는데 환자는 없고, 눈치 없는 가족들은 씀씀이가 헤프다. 불황 타개 차 조언을 얻으러 찾아간 선배는 말한다. “매일 자기 전에 세 번씩 외워. 나는 의사가 아니다, 나는 장사꾼이다.” 박 원장은 그날 밤 침대에서 중얼거리다 눈물을 흘린다. 7년간 개인 병원을 운영했던 장씨는 “나도 100% 빚으로 시작했고 주변 친구들은 규모가 훨씬 크다”며 “연습 삼아 가볍게 그렸는데 짠내 나는 소재 덕에 주목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사실주의는 만화가 지망생 연재 게시판에 습작 웹툰을 올린 지 7회 만에 방송국이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고 연락하게 한 힘이었다. 그리고 지난달 티빙에서 동명의 웹드라마 방영을 시작했다. 귀공자 이미지의 배우 이서진이 주인공을 맡아 충격을 안겼다. “드라마 제작진에게 의견을 전한 적이 있다. 주인공은 배우 김상호씨로 했으면 좋겠다고. 만화 속 박원장과 가장 흡사하다.” SBS 의학드라마 ‘닥터 이방인’에 의사로 출연했던 김상호는 실제 탈모인(人)이다. 가상 캐스팅 당시 독자들의 전폭 지지를 얻은 또 다른 대표 탈모인 배우 김광규는 동료 의사(조연)로 섭외됐다.
탈모처럼, 이 만화 역시 커다란 스트레스의 결과다.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끼고 살던 ‘보물섬’ 키드였으나,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의대에 진학했다. 잠 잘 시간조차 없는 레지던트 시절에도 만화를 그렸다. “부모님이 늘 노심초사하셨다. 언제 뛰쳐나갈지 모르니까.” 나이 마흔, 기로에 섰다. “이제 시간은 되는데 열정과 실력이 내리막이었다. 정녕 나는 틀린 것인가?” 죽기 전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 100만원을 들여 웹툰 제작 기기를 샀다. “기계에 익숙해지려고 연습 삼아 그린건데….” 만화는 네이버웹툰에서 지난해 10월 정식 연재를 시작했다.
이후 의사 생활을 접고 전업 작가로 돌아섰다. 아침 10시 작업실로 출근해 새벽 2시에 돌아온다. “노동량은 의사 때보다 훨씬 많은데, 훨씬 재밌다. 하지 말래도 하던 일이니까.” 나인투식스에서 연중 무휴로. 그러나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