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숙녀 여러분, 감사합니다. 우리는 킹스 싱어즈입니다.”
통영국제음악제 이틀째인 지난 26일. 반 세기 역사의 영국 명문 중창단 킹스 싱어즈가 무대에서 서툰 한국어로 인사말을 건네자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계속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싶지만 충분히 똑똑하지 못하니, 지금부터 영어로 말해도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하자 이번에는 폭소가 번졌다.
1968년 캠브리지대 킹스 칼리지 재학생들이 결성한 중창단이 이들의 출발점. 이들은 16세기 영국 작곡가 윌리엄 버드부터 20세기 작곡가 리게티의 작품들을 2시간 동안 반주 없이 불러나갔다. 마지막에 비틀즈의 히트곡 퍼레이드에 이어서 ‘아리랑’을 앙코르로 선사하자 갈채는 더욱 커졌다. 카운터테너의 미성에서 바리톤의 중저음으로 번지는 아리랑의 곡조에 살짝 전율이 일었다.
통영국제음악제가 올해 스무 돌을 맞았다. 코로나 사태에도 킹스 싱어즈와 첼리스트 트룰스 뫼르크, 메조소프라노 막달레나 코체나 같은 세계적 스타들이 통영을 찾았다. 매년 벚꽃 피는 봄이면 인구 12만의 소도시는 ‘아시아의 루체른(스위스 명문 음악제가 열리는 도시)’으로 거듭난다.
2002년 출범 당시 통영음악제는 ‘삼불가론(三不可論)’과 힘겹게 싸워야 했다. 인력·예산 등 인프라 구축이 전무한 상황에서, 비인기 종목인 현대음악을 듣기 위해, 남단(南端) 소도시까지 관객들이 내려올 리 없다는 회의론이었다. 통영에서 음악교사를 하다가 사표를 던지고 음악제에 뛰어든 이용민 통영국제음악재단 대표는 “처음엔 단칸 사무실에 직원 5명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통영음악제는 적극적인 차별화 전략으로 맞섰다. 우선 현대음악 중심을 약점이 아니라 강점으로 내세웠다. 지난 20년간 음악제를 통해서 첫 선을 보인 초연작만 320여 곡에 이른다. 또 독일 지휘자 알렉산더 리브라이히(2011~2013년)와 문화 행정가 플로리안 리임(2014~2020년) 등 해외 전문가들을 잇따라 예술감독과 대표로 영입했다. 올해 그 바통을 건네받은 예술감독이 세계적 작곡가 진은숙(60)씨다. 진씨 역시 2005년 상주 음악가로 음악제와 인연을 맺었다. 초대 사무국장을 지낸 김승근 서울대 교수는 “통영시 등 참여 기관들이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을 충실하게 지킨 것도 음악제의 성공 비결”이라고 말했다.
다음으로 통영 자체를 ‘음악 도시’로 브랜드화하는 전략을 내걸었다. 음악학자 이희경 박사는 “페스티벌과 함께 국제 콩쿠르와 음악 아카데미, 동요제까지 연중 개최하면서 통영이라는 브랜드 파워가 더욱 커지는 선순환을 낳았다”고 말했다. 첫 해 예산 9억원과 티켓 수입 5500만원에 그쳤던 음악제는 최근 예산 20억원과 티켓 수입 2억2500만원으로 훌쩍 덩치가 커졌다.
2014년 개관한 전문 콘서트홀인 통영국제음악당이 빼어난 음향 덕분에 국내외 연주자들에게 녹음 명소로 떠오른 것도 도약의 발판이 됐다. 바이올리니스트 대니얼 호프, 피아니스트 백건우·김대진, 첼리스트 양성원 등이 모두 여기서 녹음을 마쳤다. 굳이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음반을 녹음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희경 박사는 “앞으로 현대음악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지역성과 대중성을 놓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