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1월16일밤은 마스카니의 신가극 ‘네로네’(Nerone)를 라 스칼라에서 초연하는 날이었습니다. 오후9시에 시작됐는데 7시반에 벌써 6층으로 된 광대한 스칼라의 관람석은 가득 찼습니다. 광활한 스테이지, 대규모의 오케스트라, 웅대하고 화려한 스칼라를 처음으로 대할 때에 소리없이 감격하고 취했을 뿐이었습니다.’(‘음악의 본향인 밀라노를 찾아서:마스카니 음악’4, 조선일보 1935년6월9일)
90년 전 밀라노 유학생이 생생한 소식을 보내왔다. 1934년 오페라 유학을 떠난 테너 이인선이었다. 이인선은 ‘카발레리라 루스티카나’를 쓴 마스카니가 직접 지휘하는 신작 ‘네로네’초연(初演)을 라 스칼라(LA SCALA) 극장 6층 꼭대기 자리에서 봤다. 그 자리도 우리 돈 15원(50리라)을 내야했다. 설렁탕 150그릇(한 그릇 10전)값이었다.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마스카니 지휘의 오케스트라는 과연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100여명의 코러스의 웅장한 것도 잊지 못할 기억입니다. 최종막이 내려오자 주연 마스카니가 광적으로 박수를 받고 산회하였습니다.’
라 스칼라의 ‘카르멘’, 푸치니 극장의 ‘라 지오콘다’같은 오페라는 물론 독일의 전설적 피아니스트 빌헬름 박하우스(1884~1969)의 베토벤 리사이틀 소식도 전했다. 이인선의 ‘밀라노 리포트’는 네 차례 연속 게재됐다.
◇스키파 스승 피콜리 사사
이인선(1906~1960)은 밀라노에 유학한 첫 한국 성악가였다. 평양 출신으로 연희전문 문과를 다니다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그는 재학시절부터 선교사에게 피아노와 성악을 배워 음악회에 자주 출연했다. 의전 졸업 후 황해도 황주에 병원을 개업했지만 음악에 대한 꿈은 버릴 수 없었다. 당시 유망한 성악가였던 그는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 주선으로 1934년 6월 이탈리아 유학에 도전했다. 테너 티토 스키파(Tito Schipa·1889~1965)가 활약한 라 스칼라 극장이 있는 밀라노에서 공부하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스키파는 1920~30년대 시카고 시립오페라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주역 가수로 노래하며 인기를 누렸다. 세련되고 우아한 목소리는 유성기 음반과 잘 어울려 당시 경성에서도 꽤 알려진 스타였다. 이인선은 스키파를 가르친 에밀리오 피콜리(Emilio Piccoli)와 테너 알프레도 체키(Alfredo Cecchi)를 사사했다.
◇물가 비싼 밀라노의 가난한 유학생
유학 생활은 빠듯했다. 환율 차이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방만 얻고 음식은 밖에 나와서 따로 하기로 했는데 1달에 약 500리라의 식비가 들게 되었다’고 했다. 500리라면 조선 돈 150원이었다. 웬만한 샐러리맨 두 달치 월급이었다. 그는 ‘비아 칼비’ 5번지 아파트의 방 하나를 얻었다고 썼다. 스칼라 극장에서 2킬로 쯤 떨어진 곳으로 걸어서 25분 거리였다.
고국에선 어엿한 의사였지만 유학 생활은 고달팠다. ‘이곳서는 춤추는 것, 악보 사는 것, 배우는 것밖에 아무 재미를 모릅니다. 또 이것이 내 목적이니까 만족입니다만, 고향 생각이 나고 모든 것이 그리울 때는 눈물까지 나는 때가 있습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성악을 배우는 틈틈이 밀라노 왕립의학원에서 1년간 의학도 공부했다.
◇'동양의 스키파’로 명성
유학 3년 만인 1937년 4월 이인선은 금의환향했다. 조선일보 주최로 경성 부민관에서 귀국 독창회가 열렸다. 독창회는 대성공이었다. ‘이땅에서는 처음 듣는 듯한 놀라운 성량과 세련된 선율에 도취경에 빠진 이천 청중은 자리를 떠날 줄 모르며 박수갈채로 열광적 감탄을 마지 아니하였고…’(‘세련된 선율에 2000청중 황홀’,조선일보 1937년5월22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 베이징, 칭다오에서도 독창회를 열면서 ‘동양의 스키파’로 알려졌다.
◇병원 개업과 성악가 병행
하지만 직업 성악가로 살아가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인선은 귀국한 그해 말 충정로에 병원을 냈다. 병원을 취재한 기자가 이렇게 썼다. ‘진찰실 옆에 꽃무늬 놓은 포장을 쳐놨기에 살그머니 쳐들고 보니 커다란 피아노 한대가 엎드려 있고 그 위엔 악보가 펼쳐있다.’ 기자는 ‘낮이면 의사, 밤이면 가인, 그러나 그는 조금도 이 두개의 일에 피곤하지도 않고 어색하지도 않다’고 썼다.(’낮에는 의사, 밤에는 가수, 新版 ‘지킬박사와 하이드’, 조선일보 1938년4월15일)
◇해방 후 첫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알프레도 맡아
이인선의 활약은 해방 후 두드러졌다. 1946년 동생(테너 이유선)·제자들과 조선오페라협회(국제오페라사 전신)를 조직했다. 이듬해 벨칸토회(현 한국성악회)를 창립했다. 한국 오페라 개척자로서의 최대 업적은 우리 손으로 만든 첫 전막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올린 것이다. 1948년 1월16일~20일 서울 명동 시공관(市公館)에서 10회 연속으로 공연했다. 그는 알프레도로 나섰고 제자 김자경이 비올레타를 노래했다. 임원식 지휘, 서항석 연출이었다. 객석이 가득찰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음악평론가 한상우는 ‘이 땅에 오페라 시대의 문을 열어놓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썼다. 4월에 앙코르 공연까지 올렸다.
1950년 1월27일~2월2일 시공관에서 ‘카르멘’을 올렸다.(이유선의 ‘한국양악100년사’는 ‘카르멘’ 공연을 1949년 또는 1950년4월로 썼고, 한상우는 1951년1월로 썼으나 이는 잘못이다. 1950년1월22일자 연합신문 참조). 이인선은 총감독 및 주역 돈 호세(더블캐스팅 송진혁)를 맡았고, 메조 소프라노 김혜란이 카르멘을 불렀다. 6·25 전쟁 직전 너무나 짧았던 오페라 붐이었다.
◇'오페라의 아버지’ 느닷없는 이별
이인선은 1950년 4월 미국 내슈빌종합병원으로 연구차 가는 도중 도쿄와 하와이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1951년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오디션에 합격했지만 회비 1000달러 낼 돈이 없어 출연을 미뤘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병원 개업 준비에 바빴던 그는 1960년 간암으로 미국에서 타계했다. 미국에서 병원으로 돈을 번 뒤 오페라 운동을 재개하겠다던 이인선의 꿈은 멈췄다.
이인선의 뒤는 아들 이여진(80)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이었다. 서울대음대 재학 도중 유학길에 올라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와 이화여대에서 작곡을 가르치다 정년퇴임했다.
◇참고자료
이유선, 한국양악백년사,음악춘추사, 1985
한상우, ‘한국 오페라 역사의 문을 연 테너 이인선’, ‘기억하고 싶은 선구자들’, 지식산업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