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훈 기자

첼리스트 겸 지휘자 장한나(39)는 지난달 24일 새벽 잠에서 깬 뒤 간밤에 대소동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휴대전화에 가득 쌓인 부재 중 전화와 이메일 알림. 빈 심포니의 내한 공연에 동행할 지휘자를 급구하는 내용이었다. 당초 지휘봉을 잡을 예정이던 스위스 출신 명지휘자 필립 조르당은 코로나 확진으로 중도 하차했다. 장한나는 급히 연주 곡목부터 확인했다. 베토벤·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베토벤 교향곡 7번.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들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당일 짐을 쌌고, 그 다음 날 인천행(行) 비행기를 탔다.

장한나가 돌아왔다. 이번엔 첼리스트가 아니라 지휘자로.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1일까지 빈 심포니와 함께 서울(2차례)·인천·부산 등 4차례 내한 공연을 마친 지휘자 장한나를 출국 직전인 2일 만났다. 장한나는 “한국에서 오케스트라와 만나서 딱 2시간 반 동안 리허설하고 곧바로 다음 날부터 무대에 올랐다”며 웃었다. “프로와 프로끼리는 그리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 지휘대에 올라서 10초 안에 자기만의 해석을 보여주지 못하면 오케스트라에 잡아먹히고 마는 것이 지휘자의 운명”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아무래도 11세 때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우승한 ‘첼로 신동’ 장한나가 친숙하다. 하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첼로보다는 지휘에 주력하고 있다. 2017년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의 첫 여성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데 이어서 최근에는 독일 명문 함부르크 심포니의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다.

그는 지휘자를 꿈꾸며 베토벤·말러·브루크너의 교향곡 악보를 다시 공부했을 때의 충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악보에서 음표들이 춤을 추고 빛을 내는 것만 같았다. 음표들이 살아서 움직이는데 번쩍 눈이 뜨이면서 당장 이걸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휘자로서 그의 사표(師表)는 카라얀과 번스타인,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금도 카라얀의 베토벤 음반들은 시대순으로 모두 챙겨서 듣는다. 그는 “카라얀은 생애 후반으로 갈수록 거침없는 강물처럼 진화하고, 번스타인에게서는 자유분방한 개성과 확신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클라이버에 대해서는 “지휘자들의 지휘자이자 동시에 귀신”이라며 웃었다.

이미 첼로로 세계 정상에 섰지만, 아시아 여성 지휘자로서 설움이 없을 수 없다. 그는 “장벽이나 핸디캡이 없다면 거짓말일 테지만, 크게 맘에 담지는 않는다. 그 시간에 더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한나는 “자리가 지휘자를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오케스트라 단원 100명이 내뿜는 열정과 연륜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코로나 이전 장한나는 최소 2~3년 전부터 차근차근 연주 곡목과 일정을 짜는 편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를 거치면서 그 생각에도 조금은 변화가 생겼다. 그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대를 거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내한 공연을 마친 지금도 마찬가지다. “빈 심포니와 당장 오늘도 또 연주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