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반짝이는 역할을 맡았던 배우 수지는 드라마 ‘안나’에서 체념과 권태에 짓눌린 전혀 낯선 얼굴을 보여준다. 그는 “화려한 안나보다 가난한 유미를 연기할 때가 편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 하면 됐다”고 했다. /쿠팡플레이

배우 수지(27)에게서 이런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영화 ‘건축학 개론’이후 ‘국민 첫사랑’으로 불리게 된 뒤, 수지는 늘 예쁘게 반짝이는 배역을 맡았다. 아이돌 가수 출신에게 으레 들씌워지는 연기력 논란도 따라다녔다. 하지만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안나’에서의 연기는 괄목상대다. 지난 주말 4화까지 공개된 드라마는 작품은 물론 주역인 수지의 연기도 고르게 호평받고 있다.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마주 앉은 수지는 “주변에서 쏟아지는 칭찬이 아직 신기하고 낯설다”고 했다. “지금껏 이렇게 칭찬을 많이 받아본 적이 없었어요. 너무 좋은 말씀들 해주셔서 맨날 기사 찾아보면서 혼자 슬쩍슬쩍 웃어요.”

드라마에서 수지는 가난한 시장통 양장점 딸 ‘유미’로 자란 뒤, 우연히 시작한 거짓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며 모두가 선망하는 화려한 거짓의 삶을 사는 여자 ‘안나’가 된다. 처음 받아본 대본 제목은 ‘당신도 아는 안나’. 수지는 “다들 그 크기만 다를 뿐 어쩌면 속에 저마다의 ‘안나’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고 했다. “누구나 자기를 포장하고, 거짓말도 하고, 보이고 싶은 것만 보이려 하잖아요. 응원하면 안 되는데 응원하게 되는 매력적인 인물이어서 욕심 냈어요. 이 거짓말이 납득이 가고 공감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현실에선 안 만났으면 싶은 인물이지만.”

거짓말을 덧대어 쌓아올린 인생은 바닷가 밀물 파도 앞에 버려진 모래성 같다. 비루한 삶의 피로함, 발버둥쳐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체념, 그 모든 것에 익숙해진 권태가 무표정한 얼굴과 몸짓에서 피어오른다. 더운 여름 새벽의 들큼한 안개처럼 ‘훅’ 하고 코를 거쳐 폐 속으로 치고 들어온다. 모진 모멸감을 견딜 때, 살기 위한 노동을 영혼 없이 반복할 때, 저 배우에게 저런 표정이 숨어 있었나 감탄하게 된다. “저에겐 익숙한 제 얼굴인데 사람들이 놀라길래 ‘그동안 잘 숨기면서 살았구나’ 생각했어요, 하하.”

드라마 ‘안나’에서 배우 수지가 연기하는 ‘유미’는 모멸감을 견디며 영혼 없는 노동을 반복한다. /쿠팡플레이

이병헌 주연 영화 ‘싱글 라이더’로 호평받았던 이주영 감독이 직접 쓰고 연출한 드라마 데뷔작. 대사를 절제하고 클로즈업한 인물의 표정과 분위기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하는 독창적인 스타일은 드라마에서도 그대로다.

극중의 수지는 10대 후반에서 30대까지 거의 20여 년을 가로지른다. 그는 “안나가 거짓말에 조금씩 더 익숙해지는 정도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처음 거짓말을 할 때는 이게 먹힐까, 정말 속을까 불안해하죠. 점점 거짓말에 자신감이 생기면서 주변 사람들과 세상을 우습게 보며 더욱 대담해져요. 안나 같은 여자에게 나이 든다는 일은 그런 데 익숙해지는 과정 같았어요.”

극중 유미를 이해하기 위해 유미의 이름으로 일기를 썼다. 전문 심리 상담사의 조언을 받으며 병적으로 거짓말을 반복하는 인물에 대한 편견도 깨나갔다.

“유미의 불안에 공감하려면 나 자신의 불안과도 마주해야 했어요. ‘일을 하기 위해 내 안의 불안을 끄집어내야 하다니 참 이상한 직업이구나’ 생각했죠. 어떻게 내 불안을 유미의 불안으로 만들어 내보낼까? 호흡 같은 것, 불안한 눈동자 같은 것, 맘껏 불안해하면서 동시에 티 안 내려고 괜찮은 척 맘껏 숨기면서…. 그렇게 연기하는 과정이 행복했습니다.”

이번 드라마는 아이돌 데뷔 뒤 12년간 가수로 배우로 쉴 틈 없이 달려온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이기도 했다. “안나는 거짓말로 자신을 꾸며내며 피곤하게 살아가요. 그러다간 갑자기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오고, ‘결국 이 짓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환멸을 느끼겠죠. 과거의 나를 만난다면 토닥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너무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금은 대충 살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졌어요.”

진지한 배우로 인정받고 싶지만, ‘국민 첫사랑’이라는 별명은 놓고 싶지 않다. “저는 너무 좋아요, 앞으로도 그 별명 계속 가져가고 싶어요. 그리고 30대에는 멋있어졌으면 좋겠어요. 조금 더 나를 돌아보면서, 천천히 천천히 나의 속도로 가고 싶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