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 이은(1897~1970)은 한국 골프의 기틀을 닦은 인물로 기억된다. 일제 시기 조선의 유일한 18홀 정규 골프장인 군자리 골프장(1930년 개장)의 설립 주역이기 때문이다. 영친왕은 순종 비인 순명황후묘가 있던 유릉(裕陵)터 30만 평을 무상으로 임대하고, 건설비 2만엔과 3년간 운영비 1만5000엔을 내놓아 골프장 건립을 성사시켰다. 군자리 골프장은 일제시대 조선 골프의 본산이자, 해방 후에도 한국 골프의 주요 무대였다.
군자리 이전 경성 골프장은 효창원 골프장(1921), 청량리골프장(1924)이 있었는데, 모두 이왕직(李王職)이 관리하던 왕실 능원자리였다. 일제시기 조선 왕실 사무를 맡은 이왕직이 초창기 한국 골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다. 물론, 군자리 골프장 이용객은 총독부 고위 관료(거의 일본인)나 실업가, 조선인 귀족과 일부 상류층, 외국인 사업가 등 상류사회 인사들이었다.
이 때문에 골프장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골프라 하는 그 놀음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불과 수십명의 작난치기를 위하여 부근 주민의 생활을 불안케 하고 관공청의 ‘깨소린’을 소비하여 가며 구태여 이따위 짓을 할 것은 무엇인가. 저희들은 소위 ‘문화생활’이니 ‘모기생활’이니 되지 못한 수작을 하겠지만은 이와 같이 할 일이 없거든 차라리 ‘골프’터 만드는 송림 속에 백옥두나 지어놓고 한평생 놀아보자.’(자명종, 조선일보 1924년10월8일) 청량리 골프장을 겨냥했지만, 군자리 골프장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버밍엄 골프공 공장까지 방문
군자리 골프장 건립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훗날 경성제대 총장)이왕직 차관이 영친왕을 설득해 성사시킨 것으로 알려져있다. 평안남도 지사를 거쳐 1923년부터 이왕직차관을 지낸 시노다는 이듬해 경성골프구락부 감사를 지낼 만큼, 골프 마니아였다. 영친왕은 왜 모후의 능이 있던 자리까지 선뜻 골프장 건설에 내줬을까. 군자리 골프장 설립을 이해하려면 영친왕의 유럽여행을 들여다봐야 한다.
영친왕 부부는 시노다를 비롯한 수행원 7명과 함께 1927년5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유럽 13개국을 여행했다. 일본 외교관들이 여행 가는 곳마다 일정을 안내하고, 유럽 각국 군주들이 면담과 만찬을 베풀고 최고 훈장까지 수여하는 등 극진하게 대접했다. 영친왕의 유럽 여행은 특별한 점이 있다. 골프 관련 일정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수시로 골프장을 찾아 라운딩하거나 레슨을 받았고, 여의치 않으면 그냥 골프 코스를 둘러봤다. 골프공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시노다 차관 수행일기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라운딩 레슨
1927년 8월 말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보름간 7번 골프를 쳤다. 골프 코스를 둘러본 것만 2번이었다. 특히 8월29일 명문 골프코스인 세인트 앤드루스를 찾아 프로 골퍼와 라운딩을 하면서 레슨을 받았다. 이번 주 세계 PGA 4대 메이저대회인 디오픈이 열리고 있는 바로 그 골프장이다. 골프 마니아 시노다도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시종무관 김응선 대좌, 사토 중좌와 라운딩을 했다. 타수까지 정확하게 남겼다. 자신은 116타, 김응선은 118타, 사토는 118타 이상을 쳤다고 썼다. 영친왕이 몇타를 쳤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이튿날인 30일 오전에도 영친왕은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골프를 쳤다. 부부가 함께 돌았는데, 출발 예정 시간이 임박해 플레이를 마치지 못했다. 시노다는 일기에 썼다. ‘도중에 중단한 것은 유감이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 호텔에 며칠간 묵으면서 이 코스에서 골프를 하면 전하 부부도 만족하실텐데.여행 계획을 짤 때 누구도 이 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게 유감이다.’
31일 글래스고 근처 로열 트룬(Troon)골프클럽에선 영친왕 일행 4명이 라운딩을 했다. 1878년 설립된 로열 트룬은 2024년 디오픈이 열리는 명문 골프장이다. 시노다는 이날 영친왕이 121타를 쳤다고 기록했다. 자신은 107타, 김응선은 124타, 사토는 137타였다.
◇유럽 여행 중 골프라운딩만 17번
파리에선 부부가 함께 라운딩했고, 로마와 니스에서도 골프를 쳤다. 니스에선 2월24일과 26일, 27일 사흘간 골프를 쳤다. 그 다음주인 3월3일 마르세유에서 귀국행 배에 올랐으니, 유럽 여행 마지막 라운딩이었던 셈이다.
영친왕의 골프 여행은 사전에 준비된 것같다. 1927년 6월5일자 시노다 일기에 따르면, 홍콩에서 승선한 영국인 골프선수 로저스에게 영친왕 부부가 레슨을 받기로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6월9일 싱가포르에 잠깐 상륙한 영친왕 부부는 오후3시 교외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 시노다는 ‘일본인은 거절해왔는데, 이날 특별히 양(兩) 전하를 위해 일본인의 플레이를 허락했다’고 썼다. 영친왕은 배 위에서도 틈틈이 연습했다고 한다.
한국 골프사 연구자 조상우 호서대 교수가 시노다 일기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영친왕의 유럽 여행 중 골프 라운딩은 최소 17번, 골프장 방문은 9번이다.특히 스코틀랜드 여행 출발전인 8월23일 런던에서 골프 아카데미를 찾은 것도 눈에 띈다. 세인트앤드루스 골프장 등 잇따른 라운딩을 앞두고 대비한 듯하다. 버밍엄에선 던롭 골프공 공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영친왕,일본서 골프 입문
조상우 교수에 따르면, 영친왕은 일본 왕실을 통해 골프에 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다이쇼 천왕은 1922년 왕실 전용 골프장을 만들어 왕족들에게 골프를 권했고, 영친왕도 1920년 이방자와 결혼하면서 일본 왕족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1923년 이후 골프에 입문한 것으로 추정한다. 1925년4월 일본에서 제2회 동궁(東宮)컵 골프대회에 참가한다는 보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동경으로부터 수일전에 경성에 도착한 이왕직 고 사무관의 말을 들으면 이왕세자전하는 최근에 ‘골프’와 정구, 승마 등에 많은 취미를 가지시고 매일 맹렬한 연습을 하고 계신데 그 중에서도 ‘골프’에는 대단히 숙달되시어 사월초순경에 동경에서 거행되는 제2회 동궁컵 쟁패의 ‘골프’경기에 참가하실 예정이라는데….’(매일신보 1925년3월23일)
◇군자리 골프장 설립 나서
영친왕의 골프에 대한 관심은 1927년~1928년 골프 발상지인 스코틀랜드의 명문 클럽을 비롯, 유럽 곳곳의 골프 코스를 경험하면서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런 관심이 군자리 골프장 설립으로 이어졌다. 영친왕은 군자리 골프장을 운영한 경성골프구락부 명예회장이었다. 1930년 6월22일 군자리 골프장 개장 다음달인 7월13일 조선을 방문한 영친왕이 골프장을 시찰한다는 예고 기사(‘御歸京중의 일정’,조선일보 1930년7월 9일)가 실렸다. 그는 주로 일본에 머물렀기에 이곳을 자주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왕실 능묘를 참배하러 귀국한 1938년 4월21일 군자리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는 기사 정도가 있을 뿐이다.
100년 전 조선에서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은 극히 일부였다. 1930년대 경성의 골프장은 군자리 한 곳밖에 없었고, 비용도 당연히 비쌌다. 경성골프구락부 자료에 따르면, 1938년 그린피는 평일 3엔, 주말 5엔이었다. 한 해전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오페라 ‘나비부인’ 최고가 특등석 티켓이 5원, 일등석은 3원이었고, 설렁탕·냉면 한그릇에 20전 안팎이던 시절이었다.
망한 나라의 왕족이 수행원을 거느리고 1년 가까이 특급 호텔에 묵으며 호화판 유럽 여행을 다닌 게 불편한 건 사실이다. 6.10만세운동 이듬해의 일이라 더 그렇다. 지금도 가기 어려운 스코틀랜드 명문 골프클럽에서 라운딩을 즐기고, 골프공 공장까지 방문한 것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영친왕의 골프 여행이 군자리 골프장 건설로 이어지고, 오늘날 세계를 휩쓰는 한국 골프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참고자료
송우혜, 평민이 된 이은의 천하, 푸른역사, 2012
김을한, 인간 영친왕, 탐구당, 1981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정음사,1985
篠田治策, 歐洲御遊隨行日記, 大阪屋號書店, 1928
이왕직, 李王同妃兩殿下 御渡歐日誌, 1928
조상우, ‘영친왕의 골프활동에 관한 연구’, 한국응용과학기술학회지 37-4, 2020,8
조상우, 일제강점기 골프구락부의 설립과 조선골프연맹의 창립 및 활동, 한국골프학회지 9-3, 2015
대한골프협회, 한국골프 100년: 1900~2000, 2001
※'기사보기’와 ‘뉴스 라이브러리 바로가기’ 클릭은 조선닷컴에서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