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3월 경성역에 도착한 세계일주관광단을 위해 출동한 인력거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자동차가 충분치 않아 관광단은 인력거 640대를 타고 창덕궁을 구경했다. 조선일보 1926년3월10일자

1926년 3월9일 아침 경성역 앞에 인력거 640대가 몰려들었다. 미국을 비롯한 38개국 출신 세계일주관광단 637명을 맞기 위해서였다. 이 대규모 관광단은 하루전인 8일 오후 2만톤 기선 ‘라코니아’호(號)를 타고 인천항에 들어왔다. 경성까진 임시열차로 이동했다. 당시 그만한 인원을 태울 자동차가 경성엔 없었다. 인력거에 한사람씩 태우는 게 유일한 방안이었다.( ‘인력거로 장사진’, 조선일보 1926년3월9일)

◇호텔 모자라 기차 침대칸에서 숙박

관광단은 두차례 나눠 입경(入京)했다. 8일 저녁 8시5분 1차 97명이 들어왔는데, 숙소가 충분치 않았다. 1914년 문 연 조선호텔에 50명이 묵고, 나머지는 경성역 구내에 정차한 열차 침대칸에 재웠다. 해외 관광객을 받을 인프라가 없던 시절이었다. 다음날인 9일 오전 10시45분 본진 540명이 열차로 경성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두팀으로 나눠 창덕궁 비원과 갓 들어선 총독부 청사 등 시내 관광에 나섰다. 한나절 관광을 마친 이들은 오후4시5분 열차로 인천에 돌아갔다.( ‘입경한 미국관광단’, 조선일보 1926년3월10일 석간2면, ‘미관광단 퇴경’, 조선일보 3월10일 조간2면)

위키피디아 1922년 진수한 영국 선적 2만톤 기선 라코니아. 배 길이만 183.3미터다. 최초로 세계 일주 크루즈를 한 배로도 알려졌다. 1926년 3월8일 인천항에 들어온 라코니아 승객 640명이 경성 관광을 즐겼다.

◇세계일주관광이란 과연 무엇?

서양 관광객들이 탄 인력거 640대가 거리를 달리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신문에도 줄지어 늘어선 인력거 사진이 실렸다. 관광 인프라 부족도 도마에 올랐다. ‘여관 불비(不備)는 빈약의 소치(所恥)’(‘팔면봉’, 조선일보 1926년3월10일 석간1면)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2만톤 초대형 기선에 640명 넘는 여행객이 선상 무도회를 열고, 목사까지 동반해 결혼식까지 올린다는 얘기는 도무지 납득할 수없었던 모양이다. ‘팔면봉’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세계일주관광단! 관광이 과연 무엇?’ 어마어마한 돈을 내고 초대형 기선으로 세계일주 관광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식민지 상황에선 초현실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위키피디아 1920년대 라코니아 호 선실 내부를 담은 사진. 가든 라운지, 식당, 라운지, 흡연실이다.

◇”그대들은 우리를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대규모 세계일주관광단은 신문 사설에도 등장한다. ‘우리는 열국의 손님들이 많이 와서 우리 조선을 시찰하고 돌아가서 각기 생각하는 대로 우리 조선 사람의 생활과 모든 제도를 비판하여 주기를 바란다.’ 사설은 이런 당부도 했다. ‘그대(미국인)들의 선조가 1776년에 있어서 영국에 대하여 취하던 그 정신과 그 태도로써 우리에게 대하고 또 우리를 이해하여 주기를 바란다.’(‘미국관광단’, 1926년3월11일) 식민지 조선의 처지에 공감과 연민을 보여달라고 에둘러 표현한 셈이다.

◇최초의 세계일주 크루즈 항해 한 라코니아

세계일주 관광단이 타고 온 라코니아(Laconia)호는 영국 리버풀에 선적(船籍)을 둔 대형 기선이었다. 1922년 5월25일 영군 사우샘프턴에서 보스턴으로 첫 항해를 했다. 이후 늦봄부터 초겨울까지 대서양을 정기 운항했다. 1등석 350명, 2등석 350명, 3등석 1500명 등 승객 2200명을 수용할 수있었다고 한다.

첫 항해한 1922년11월21일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社)가 임대해 세계일주 항해에 나섰다. 승객 347명을 태우고 130일간 항구 22곳을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최초의 세계일주 크루즈여행이었다. 라코니아는 첫 항해 20년 만에 비운의 최후를 맞는다. 2차 대전 당시 군함으로 쓰이다 1942년 9월12일 밤 독일 잠수함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 군함에 탄 이탈리아군(軍) 포로 1809명 중 415명만 구조됐다고 한다.

관광객 중엔 꼴불견도 있었다. 석영 안석주는 만문만화에서 인력거에 탄 젊은 여성이 담뱃대를 꼬나물고 부채질하며 거리를 달리는 모습을 담았다. 조선일보 1930년4월20일

◇대규모 관광단 온다는 보도 줄이어

20세기 전반은 대형 기선, 철도의 등장으로 모험가의 전유물이던 세계일주가 가능해진 시대였다.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부산, 인천에도 세계일주관광단이 들어왔다. 세계 대전이 마무리된 1920년, 조선까지 찾아오는 세계일주관광단이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 신문 지상에나 무슨 통신을 보든지 유람객이니 관광단이니 하여 가지고 내조(來朝)한다는 보도가 없을 적이 없다.’(‘餘墨’, 조선일보 1920년5월12일)

‘외국인들은 대대적으로 세계주유관광단을 조직한다는데 언제든지 이러한 일에는 남에게 밑지지 않는 미국인이 남먼저 내(來)19일에 도착하리라는 ‘레이몬드웟트컴’사(社)의 일행 19명을 위시하야 내년 1월에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社) 주최로 조직된 450명의 관광단이 일본에 도착하야 그 중 100명은 조선을 거쳐서 중국으로 향한다 하며 또 이어서 동월에 ‘유나이티드 아메리칸라인’사(社)의 주최인 동항단(東航團) 450명이 ‘조류트’호를 타고 일본 횡빈에 도착하야 그 중 40명이 조선을 시찰하리라 하며….’( ‘전천후 타격 받던 조선호텔의 금후’, 조선일보 1925년11월11일) 1차대전으로 손님이 준 조선호텔 영업이 다시 활기를 띨 것이라고 예측했다. 세계일주 관광단이 조선에 온다는 뉴스는 1920년대~1930년대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선일보 1929년4월14일자 2면에 실린 사진. 인력거를 탄 미국관광단이다. 이런 사진이 종종 신문에 실렸다.

◇자동차 100대로 경복궁, 덕수궁 구경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인력거 대신 자동차로 이동할 만큼 형편이 좀 나아졌다. 1935년 4월 미국 세계일주관광단 방한을 소개한 기사는 이렇다. ' ‘딸라’의 나라 미국의 호화선 ‘레조류트’호 세계일주관광단은 중국 방면의 관광을 마치고 11일밤에 인천에 입항하야 하루저녁을 배안에서 새운 후 12일 아침에 인천에 상륙한 일행 300명은 전부 일등차로 편성된 임시열차로 오전 9시55분에 경성역에 도착하야 두 대로 나누어 자동차 100여대를 몰아 덕수궁, 경복궁, 총독부박물관 등을 구경한 후 오후0시15분에 조선호텔에 점심을 먹으며 조선 기생들의 춤추는 것을 구경하고 오후4시 임시열차로 인천으로 돌아갔다.’( ‘관광단 호화판 6시간에 7000원’, 조선일보 1935년4월13일)

1937년 여름 경성을 찾은 미국 관광단은 급행열차 노조미호로 경성에 와서 만주로 이동한다고 소개했다.

◇'담뱃대 꼬나물고 부채질하는 젊은 여성’

서구 관광객중엔 현지 문화를 고려하지 않는 꼴불견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인력거를 탄 젊은 여성 관광객이 담뱃대를 물고 부채질하면서 거리를 누비기도 했다. 상중에나 쓰는 백립(白笠)까지 머리에 얹어 혀를 차게 만들었다. ‘촌평의 달인’ 석영 안석주(1901~1950)가 쏘아붙였다.

‘미국의 세계 관광단이란 언제나 도처에서 그 본색을 드러내어 어느 곳에서든지 그들의 특이한 연출은 대 갈채를 받아왔지만 이번에 서울을 다녀간 양키레뷰단은 특히 그 대(大)탈선적 여흥을 보여주었다.’ 안석주는 한마디 보탰다. ‘본받기 잘 하는 이땅의 아가씨들에게 보이기에 꺼려할 만한 꼴이다.’(양키 레뷰단의 가장행렬, 조선일보 1930년4월20일)

◇이정섭과 이순탁의 세계일주기, 신문 연재

1920년대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중국과 러시아, 일본은 물론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 취업, 사업 또는 순전히 여행을 위해 세계로 나갔다. 1920년 조선, 동아일보 창간으로 우리말 민간 신문이 등장하고 개벽, 삼천리, 조광 등 잡지의 전성시대가 열리던 시절이었다. 조선인의 세계 여행기는 신문, 잡지에 홍수처럼 쏟아졌다. 조선일보 네컷 연재만화 ‘멍텅구리’는 1926년 2월부터 6개월간 ‘세계일주’편을 실어 조선인의 세계 인식을 확장시켰다.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대학을 졸업한 이정섭은 1927년 중외일보 특파원으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하면서 신문에 연재 기사를 실었다.

◇1920~30년대는 ‘여행의 시대’

연희전문 교수 이순탁은 1933년4월24일 경성을 출발 이듬해 1월20일 귀국할 때까지 9개월간 17개국을 다니며 현장에서 여행기를 써서 전신으로 보냈다. 도쿄, 요코하마, 상하이, 홍콩, 싱가포르, 카이로를 거쳐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영국, 아일랜드에 이어 미국을 거쳐 태평양을 건너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조선일보에 60여차례 연재된 이순탁의 세계일주기는 서유럽을 휩쓴 대공황과 자본주의 위기, 파시즘의 특세를 경제학자 안목으로 관찰한 심층보고서였다. 1920년대~1930년대는 여행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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