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사라진 이후의 영웅극도 가능할까. 전 세계 최초로 9일 개봉한 영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이런 질문을 던지며 출발한다. ‘블랙 팬서’는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같은 영웅들이 즐비한 마블 스튜디오의 첫 흑인 주인공으로 화제를 모았다. 2018년 전편 개봉 당시 국내에서도 540만 관객을 동원하며 인기 몰이를 했다.
하지만 1편에서 블랙 팬서 역을 맡았던 배우 채드윅 보즈먼(1976~2020)이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겪었다. 시리즈의 간판 역할을 해야 하는 주인공을 잃고 만 것이다. 4년 만의 속편인 ‘와칸다 포에버’는 대역(代役)이나 컴퓨터 그래픽으로 우회하는 대신, 블랙 팬서의 장례식 장면에서 출발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영화 역시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마블 스튜디오를 상징하는 빨간 영화사 로고에도 보즈먼의 얼굴이 가득하고, 영화 초반 와칸다 왕국의 거리에도 블랙 팬서의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처럼 영화는 보즈먼에 대한 추모를 강하게 드러낸다.
블랙 팬서의 타계 이후 와칸다 왕국은 기존의 서방 강대국들이나 새롭게 등장한 해저 왕국과 잇따른 군사적 갈등을 겪게 된다. 초반 설정부터 속편은 기존의 영웅극 대신에 첩보물이자 전쟁물의 장르 공식을 과감하게 도입한다. 여왕부터 공주, 여성 장군과 여성 과학자들까지. 사실상 주인공이 사라진 자리를 채우는 것도 대부분 흑인 여성이다. 이처럼 속편은 최근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정치적 올바름의 추세를 이어받는 방식을 택했다. 더불어 단독 주연의 1인 드라마에서 여러 배우가 동등한 비중으로 출연하는 ‘앙상블 캐스트’에 가깝게 변모했다.
따지고 보면 선악의 선명한 구분이야말로 초능력 영웅들이 등장하는 수퍼 히어로 영화의 기본 공식이다. 하지만 이번 ‘와칸다 포에버’에는 반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악당이 나오지 않는다. 대신에 국제 정치적 비유를 통해서 무력 사용이나 보복 공격의 선제 조건이나 도덕적 약점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는다. 와칸다 왕국과 해저 왕국의 전면전은 기존의 패권 국가와 신흥 강국의 대결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의미는 넘치는 반면, 재미는 반감됐다고 할까. 세련된 비유와 수사에도 불구하고 2시간 40분 상영 시간 내내 극적 갈등이 두드러지지 않는 점은 이번 속편의 치명적 약점이다. 2010년대 ‘어벤져스’ 시리즈의 돌풍 당시 전편과 후속편을 이어주는 거대한 서사 구조는 이 장르만의 남다른 차별점이자 경쟁력으로 꼽혔다. 이 때문에 ‘마블 유니버스’나 ‘마블 세계관’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리즈가 계속될수록 전편과 연결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차별화해야 하는 이중 과제의 짐은 너무 무거웠나 보다. 관객 역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즈음이면 피로감을 호소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